시네마 서방정토- 윤종찬 감독의 소름
악업(惡業) 대물림 통해 인과응보 일깨워
영겁회귀(永劫回歸) 라스트씬 단연 압권
주인공 삶 통해 가족해체 세태 꼬집어
“보살은 원인을 두려워하고 중생은 결과를 두려워한다(菩薩畏因 衆生畏果)”는 말이 있다.
보살은 나쁜 원인을 끊어 버리기 때문에 업장이 사라지고 공덕이 원만히 쌓여 가서 끝내 부처가 되고야 말지만 중생은 늘 나쁜 원인만 지으면서 나쁜 과보를 피하려고 한다는 뜻이 담긴 말이다.
인과응보의 진리는 삼세에 걸쳐 나타난다(報通三世)고 한다. 금생에 지은 선악의 과보로 금생에 화복(禍福)을 받는 것이 현보(現報)이고, 금생에 지은 선악의 과보로 내생에 화복을 받는 것이 생보(生報)이다. 그리고 금생에 지은 선악의 과보를 미래의 제3생이나 제4생 또 백 천 만생 뒤에야 비로소 받는 경우는 후보(後報)라고 한다.
영화 〈소름〉은 인과응보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영화다. 〈소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남자 주인공인 용현의 출생년도와 출신성분이다. 용현은 1972년 쥐띠 생이자 고아이다.
1972년생은 대표적인 월남 베이비 붐 세대이며 도시이주민 2세대이다. 이 같은 상징은 용현이 애완동물로 쥐의 사촌인 햄스터를 키우는 것을 보면 보다 명징해진다. 용현은 햄스터를 자신의 분신과도 같이 아낀다. 햄스터는 ‘외로울 것 같아서 다른 놈을 넣어주면 사정없이 물어 죽이고 1주일간 집을 비워도 끄덕 없이 살아있는’ 생존력을 지닌 존재이다.
중국집 배달부가 교통사고로 전복돼 죽은 것을 보고 통쾌하게 웃고, 고아라고 놀려대는 친구를 학교 뒷산으로 불러 칼로 찔러 죽이는 용현의 위악적인 모습은 햄스터의 습성과 일치한다.
다음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영화 속의 배경이다. 〈소름〉에 등장하는 배경은 크게 세 개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영화의 배경이자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미금아파트’이며, 두 번째는 용현이 선영과 데이트 장소로 찾는 교외 농촌이며, 세 번째는 용현이 선영의 남편을 묻고 선영을 묻었던 곳이자 선영이 자신의 아이인 영준을 묻었던 비 내리는 야산 숲 속이다.
미금아파트는 허물어지기 직전의 시민아파트이다. 도시빈민 1세대의 주거공간이 달동네라면 도시빈민 2세대의 주거공간은 바로 이 시민아파트이다. 미금아파트는 또한 아파트라는 특징 때문에 이웃과 소통이 단절돼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반면 용현이 ‘여자가 생기면’ 찾아가는 교외 농촌은 관객들로부터 기시감(데자뷰)을 유발하는 공간이다.
영화 속에서 용현과 선영은 기와집의 폐가를 두 번 찾는다. 처음 찾았을 때 용현은 이소룡을 흉내내며 발차기를 하다가 신발끈이 풀어지고, 두 번째 찾았을 때 용현은 선영에게 지난 번 신발끈을 묶어줬을 때 엄마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어느 시골초등학교 어린이 동상 앞에서도 용현은 선영의 아이 얘길 꺼낸다. 용현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인 모성애가 선영에게는 죄책감이 된다. 즉, 교외 농촌 풍경은 남자 주인공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만 여자 주인공에게는 죄책감이 되는 곳이다.
영화의 배경 중 가장 ‘소름’ 끼치는 공간인 비 내리는 야산 숲 속은 앞서 설명한 대로 주인공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묻는 곳이다. 그 공간은 선영이 아이를 가둬버린 옷장이나, 용현이 죽인 옛 애인(미정)의 장신구를 보관하는 냉장고 속과도 묘하게 일치한다.
〈소름〉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부모애’가 없이 자랐거나 ‘부모애’의 의무를 방기한 이들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용현과 선영은 모두 부모의 사랑 없이 자랐다. 용현은 자기의 뿌리를 알지 못하는 고아이며, 선영은 ‘엄마는 일찍 죽고 제 정신이 아닌 아빠는 집을 나가 버리고 소식이 없어’ 혼자 살아왔다. 또한 선영은 자신의 아이를 죽인 엄마이기도 하다.
미금아파트의 저주를 소설로 쓰는 이 작가도 출판사의 경영 실패로 이혼을 한 상태이고, 미금아파트 504호에서 먼저 살다가 불에 타 죽은 작가지망생 광태도 불 타 죽은 아이의 영혼을 핑계로 아버지의 역할을 회피한 인물이며, 광태의 아이를 뱃속에 가진 은수도 광태가 죽자 낙태를 함으로써 어머니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인물이다.
부모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은 인물들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미금아파트도 줄곧 아이 양육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 용현이 504호에서 불 탄 천장을 바라보거나, 선영이 영준이 옷장 속에서 손톱이 빠지도록 긁어댄 흔적 같은 아파트 벽면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소름〉에서는 끊임없이 불륜의 범죄가 벌어진다. 용현은 30년 전 504호의 남자가 버리고 간 아이이다. 용현의 아버지는 이웃집 여자와 눈이 맞아 본처를 죽이고 야반도주한 인물이다. 용현의 아버지는 선영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용현과 선영이 선영의 남편을 야산에 묻고 며칠 후 격렬한 정사를 나눈 후 주고 받는 대사는 섬뜩하다.
“이제 우리 어떡해?”
“뭐가?”
“죄지었잖아요.”
여기서 ‘죄’는 선영의 남편을 죽여 사체를 유기한 죄이자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한 불륜의 죄이자 혈연간에 정사를 나눈 근친상간을 말한다. 근친상간의 죄는 결국 혈연살해라는 최고의 비극의 상황으로까지 이어진다. 흥미로운 사실은 용현이 유년기에 겪은 상처들은 고스란히 선영에게 되돌려진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본처를 죽이고 제 어머니와 도망갔던 것처럼 선영은 제 남편을 죽이고 외간남자와 정을 통한다. 용현의 아버지가 용현을 버린 것처럼 선영은 영준을 버린다.
이 모든 범죄의 배후에는 미금아파트가 있다. 미금아파트는 용현과 선영을 불러들여 다시금 불륜의 향연을 벌이도록 사주한다. 선영이 남편에게 얻어맞고 아파트 옥상에서 자살을 기도할 때 용현은 그 자리로 올라가 선영의 죽음을 잠시간 유보시킨다. 그리고 둘은 30년 전에 미금아파트에서 일어난 불륜의 범죄를 답습한다. 용현이 선영을 죽이고 선영의 지갑에서 발견한 사진 속의 인물은 미금아파트 ‘시민이발관’에 붙어있는 사진 속의 인물과 일치한다.
그는 용현의 아버지이자 선영의 아버지이다. 또한 그는 도시빈민2세대의 모든 아버지이기도 하다.
바로 미금아파트의 분신인 것이다. 용현이 미금아파트를 바라보면서 진저리 치는 마지막 장면은 결국 용현이 미금아파트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떠날려야 떠날 수 없는 공간.
아픈 기억처럼 깜빡깜빡 거리는 미금아파트의 불빛. 용현에게 이미 미금아파트는 떠나려야 떠날 수 없는 원형의 공간이 된 것이다. 미금아파트 앞에서 비를 맞고 서 있는 용현의 모습은 영겁회귀(永劫回歸)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유응오 기자 arche@jubul.co.kr
인터뷰- 소름 매가폰 윤종찬 감독
“용현은 우매한 현대인의 초상”
"인과응보의 가르침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소름의 제작경위에 대해 이같이 말하고 윤종찬 감독은 “악업의 대물림을 받는 용현의 모습을 통해 이기주의의 물든 현대인의 초상을 그리고 싶었다”며 “비록 불자는 아니지만 독실한 불자인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영화의 서사가 불교적인 색채를 띠게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특별히 근대화의 담론을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빈한한 사람들의 슬픔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낡은 아파트를 영화의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한 것도 빈한한 사람들에 애정에 기인한 것이라고 감독은 말했다.
윤종찬 감독은 현재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의 삶과 사랑을 다룬 영화 〈청연〉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유응오 기자 arche@jubul.co.kr
주간불교 831호 2005년 1월
http://www.bulgyonews.co.kr/news/122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