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호 감독의 꿈
자연사계에 담긴 생로병사(生老病死)
‘일장춘몽’조신설화 완벽 재현
홍안미소(紅顔微笑)는 풀 위 이슬이요
지란약속(約束芝蘭)은 광풍 앞 꽃이라
배창호 영화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서정성이다. 서정성 근간은 휴머니즘이라는 철학으로 채워져 있다. 그의 영화에 좀처럼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서정성의 밖은 수려한 영상문체가 자리하고 있다. 그의 카메라에 담긴 풍경은 마치 인상주의 화가의 화폭을 연상시킨다. 그의 영화 속에서 모든 풍경들은 봄꽃의 향연처럼 형형색색(形形色色)이 살아서 넘실댄다. 이 같은 특징은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1982)》에서부터 최근작 《길(2004)》에까지 일관되게 이어지는데, 그의 영화 중 단연 서정의 결이 돋보이는 작품은 《꿈(1990년 作)》이다.
배창호의 《꿈》은 신상옥의 《꿈》(1967)이 만들어진지 20여 년이 지난 후 리메이크된 작품이다. 신상옥의 《꿈》은 이광수의 《꿈》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졌으며, 이광수의 《꿈》은 삼국유사에 실린 조신설화를 원형으로 두고 있다.
대개 원작을 뛰어넘는 리메이크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게 영화계 관례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구스 반 센트의 《사이코》와 스티븐 소더버그의 《솔라리스》이다. 상당한 스타일리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두 감독은 알프레드 히치콕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는 대가의 아우라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배창호의 《꿈》은 원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배 감독은 촬영 당시 심적 부담감이 없이 비교적 자유로운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작품의 원형이랄 수 있는 조신설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를 살펴보면 원작에 빚을 지지 않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신상옥의 《꿈》이 이광수의 《꿈》에 충실한 작품이라면 배창호의 《꿈》은 조신설화를 복원하는데 노력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배창호는 애욕의 덧없음을 돋을 새김하고 있는 반면 신상옥은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신상옥의 작품이 보다 설화적 상상력이 뛰어난 점도 차이점으로 들 수 있다.
달례가 조신에게 바위에서 꽃을 따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은 〈헌화가〉를 떠올리게 한다.( 〈헌화가〉는 나중 한국문학의 중요한 원형이 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미당 서정주의 〈노인헌화가〉와 윤대녕의 〈신라의 푸른 길〉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배창호의 《꿈》은 조신설화의 복원에 매우 충실하고 있다. 조신설화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구운몽》에 영향을 끼친 환몽설화이다. 즉, 조신설화는 ‘갈구(渴求)-세락(世樂)-후고(後苦)-각찰(覺察)’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환몽설화의 구조는 영화 속 캐릭터와 영상 속에서 잘 드러난다. 애욕을 좇아 파계를 한 후 점차 일그러져 가는 조신(안성기 역)의 모습은 고뇌하는 니힐리스의 심경이 그대로 그려지고 있다. 또한 카메라에 담긴 자연 사계(四季)의 풍광은 생노병사(生老病死) 사고(四苦)와 그대로 환치되면서 가슴 먹먹한 감동을 준다. 들녘에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고, 녹음이 짙어오고, 낙엽이 떨어지고, 폭설에 설해목(雪害木)이 부러지고…. 그런 계절의 변화 속에서 조신과 달례도 늙고 병들어간다. 애욕의 덧없음을 강조하다보니 결국 두 주인공의 삶은 낭하 끝에 서게 된다. 조신은 살인을 저지르는가하면 달례는 몸을 팔다가 문둥병까지 걸린다.
영화의 압권은 눈 쌓인 해변에 엎드려 달례 약혼자의 칼날을 기다리는 조신의 모습이 법당에 엎드려 졸고 있는 모습으로 바뀌는 장면이다.
저녁 어스름에 깨어나 새벽인줄 알고 황망한 마음을 어쩔 줄 모르고 허둥거려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생은 그처럼 덧없는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홍안의 미소(紅顔微笑)는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의 약속(約束芝蘭)은 광풍 앞에 버들꽃일 뿐이다’라는 조신설화의 한 대목을 읊조리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배창호 미학은 나중 이명세 감독에게 이어진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의 주제가 이어진다는 점에서 《개그맨》은 《꿈》의 현대판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유응오 기자 arche@jubul.co.kr
▩ 배창호 약력
1953년 출생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수상경력
제 21회 대종상 감독상(<꼬방동네 사람들>)
제 24회 대종상 감독상(<깊고 푸른 밤>)
제 3회 영평상 감독상(<고래사냥>)
제 29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감독상(<적도의 꽃>)
2000년 이탈리아 우디네이 아시아영화제 최우수 관객상 (<정>)
2000년 프랑스 베노데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최우수 관객상 (<정>)
배창호 감독 인터뷰
“낙산사 문화재 복구 기원”
촬영 도와준 수덕사 스님들께 감사
“최근 낙산사 문화재들이 화마(火魔)에 의해 소실됐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감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낙산사는 조신스님의 설화가 담긴 곳이자 제 영화 《꿈》의 촬영지라 그 충격은 매우 컸습니다. 낙산사 문화재들의 조속한 복구를 기원합니다.”
배창호 감독은 낙산사 화재를 애석해하면서 말머리를 풀었다. 배 감독은 추억이 깃든 곳이어서 애정이 각별한 지 촬영당시 낙산사 풍광에 대해 회고했다.
“낙산사는 천년고찰의 면모를 충실히 간직했던 사찰이었습니다. 원통보전은 물론이고 석탑이며 돌담마저도 필름에 담기에 아름다운 현장이었습니다.”
배 감독은 이어 촬영 당시 불교계의 도움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영화를 찍을 때 스님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영화 제목을 정해준 이도 당시 수덕사 방장스님과 주지스님이었습니다. 뒤늦게나마 도움 주신 스님들게 감사드립니다.”
기독교신자가 불교영화를 찍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배 감독은 “모든 종교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대중을 구제한다는 측면에서 일치한다”며 “조신스님 설화는 예전부터 욕심을 냈던 제재”라고 말했다.
최근 발표작인 《정》과 《길》에 대해 배 감독은 “제 영화의 화두(話頭)는 인간애”라며 “길 위에서 정을 느끼는 것이 인생사가 아닌가 싶다”고 털어놨다.
유응오 기자 arche@jubul.co.kr
주간불교 843호 2005년 4월
http://www.bulgyonews.co.kr/news/122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