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서방정토-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병 속의 새' 화두 좇는 만행(卍行)
펠리니 '길'에 바치는 로드무비
내 눈의 점안은 누가 해주나
고뇌하는 지산스님 모습
독재정권 지식인 표상
〈만다라〉를 보고 나면 임권택 감독이 왜 펠리니의 〈길〉을 최고의 영화로 꼽는지 알게 된다. 두 영화는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길 위를 떠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만다라〉는 임권택 감독의 첫 번째 로드무비이다. 이후 임권택의 로드무비는 〈서편제〉와 〈취화선〉으로 이어진다. 〈만다라〉가 깨달음을 얻고자 떠나는 운수납자의 만행이었다면 〈서편제〉는 득음(得音)을 위해 떠나는 소리꾼들의 시김새이고 〈취화선〉은 진경산수(眞景山水)를 향한 화가의 붓질이었다. 이들 영화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주인공들이 아비규환의 역사 한 복판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산스님과 법운스님(만다라의 주인공)의 염불이 파시즘의 칼날에 숨통을 조여야 했던 민중의 아픔을 달래주듯이 송화(서편제의 주인공)의 노래는 상처투성이인 현대사를 위무하며, 장승업(취화선의 주인공)의 화폭은 조선말 격동의 역사를 담고 있다. 임 감독에게 '길'은 '역사'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만다라〉는 감독의 첫 번째 불교영화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임 감독은 이후 한승원의 원작소설인〈아제아제 바라아제〉을 영화화하는데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상이하다. 〈만다라〉는 상구보리(上求菩提)에,〈아제아제 바라아제〉는 하화중생(下化衆生)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만다라〉를 살펴보자.
스산한 겨울길에 버스 한 대가 들어선다. 군인의 검문이 시작되고 승려증이 없는 지산스님은 검문소로 끌려 내려온다. 함께 버스를 타고 있던 법운스님도 따라 내린다.
영화의 시작은 매우 살풍경하다. 감독은 스님들이 검문을 당하는 모습을 통해 군부독재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영화가 개봉된 해는 1981년으로 5.18민주화항쟁이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이다.
법운스님은 검문소에서 독경하는 지산스님의 모습에 감복했다며 함께 길을 떠날 것을 청하지만 지산스님은 제 길을 간다. 시간이 흘러 법운스님은 한 절에서 술을 찾는 지산스님을 만난다. 지산스님은 법운스님에게 부처는 법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산문에 들었으나 어머니에 대한 애증을 떨쳐내지 못해 괴로워하던 법운스님은 지산스님과 함께 만행길에 오른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영화 속 인물과 풍경이다. 지산스님과 법운스님은 대조를 이루면서도 어느 부분 동일하다. 지산스님은 계율 밖에서 수행을 하고 법운스님은 계율 안에서 수행을 한다. 영화 속 공간도 크게 산사와 저자거리로 나뉘어 대조를 이루지만 결국 깨달음을 구하는 장소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영화는 지산스님의 과거사를 조명한다. 지산스님은 풀리지 않는 화두에 답답해하던 차에 옥순을 만나다. 옥순의 도발적인 유혹에 지산스님은 계율에 깨뜨린다. 지산스님은 승적을 박탈당하고 옥순과 올라와 육욕에 빠져 지낸다. 욕망의 허망함에 눈뜨면서 지산스님은 옥순과 이별을 한다. 그리고 3년 후 창녀가 된 옥순과 조우한다.
카메라는 다시금 현재로 돌아온다. 지산스님은 법운스님을 데리고 옥순이 있는 사창가로 간다.
정성일 영화평론가나 장선우 감독이 주목했다시피 이 영화의 백미 중 하나는 지산스님과 옥순이 만나는 장면이다. 옥순이 지산스님을 만나 처음 해주는 일은 양말을 빨고 고무신을 닦아주고 발을 씻겨주는 것이다. 정성스럽다못해 숭고하다고 느껴지는 옥순의 행동은 감독의 사랑관이 그대로 배어있다. 이는 펠리니의〈길〉에서 남녀주인공의 관계와 매우 유사하다. 임 감독은 펠리니의〈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안소니 퀸이 줄리에따 마시나가 죽은 것을 알고 우는 장면이 가장 감동적이었습니다. 자기가 갖고 싶으면 언제라도 가질 수 있는, 함부로 해도 되는 그런 여자가 어느 날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자, 비로소 그 여자가 자기한테 얼마나 소중했던지 깨닫고 섧게 우는 마지막 장면이……."
이 같은 임 감독의 사랑관은 〈창(娼)〉에도 잘 나타난다. 영화 속 주인공인 영은과 길룡은 젤소미나와 짐파노의 관계를 거꾸로 옮겨놓은 듯 하다.
수년만에 다시 만난 지산스님과 법운스님은 산 속 작은 암자에게 함께 생활한다. 하루는 무당이 찾아와 암자를 지었으니 봉불식 날 부처님에게 점안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점안식을 마치고 지산스님은 "내 눈의 점안은 누가 해주냐"는 자조적인 말을 읊조리며 술을 들이킨다. 법운스님은 석탑 앞에서 얼어 죽어 있는 지산스님을 발견한다. 법운스님은 지산스님을 다비하고 옥순을 찾아가 지산스님이 들고 다니던 번뇌에 찬 불상을 전한다.
영화가 원작과 가장 다른 점은 마지막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는 법운스님이 저자거리로 뛰어들지만 영화 속에서는 만행의 길을 다시 떠나면서 끝이 난다.
임 감독이 원작에서 주목한 것은 대중교화가 아니라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불교의 두 가지 명제인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중 전자를 택한 것이다.
영화 〈만다라〉의 백미 중 하나는 '병 속의 새'라는 화두이다. 이는 소설에서 그대로 차용한 것인데, 소설에서는 법운스님이 새가 날아가는 환영을 봄으로써 화두를 풀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다비식 장면만 보여준다. 감독에게는 깨달음에 목말라했던 법운스님의 몸을 형체도 없이 태우는 불의 이미지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굳이 바슐라르의 사상을 들지 않더라도 불은 소멸인 동시에 영원성을 상징한다. 〈취화선〉의 마지막 장면에서 장승업이 자신이 만든 막사발과 함께 도자기 터로 들어가는 것도 같은 이유다. 역설적이지만 감독은 주인공을 불구덩이에 넣어 죽임으로써 영원히 살게 하고 있다.
유응오 기자 arche@jubul.co.kr
임권택 감독 인터뷰
"선암사 지허스님께 감사"
가장 적극적으로 촬영 임한 작품
"선암사 지허스님의 도움이 없었다면〈만다라〉는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임 감독은 촬영 당시 고충에 대해 설명하면서 촬영을 허락한 선암사측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전 조계종 사찰이 촬영을 허락하지 않아 매우 애를 먹었습니다. 원작자인 김성동 씨는 승적마저 박탈당한 상태였으니 조계종의 반대가 오죽했겠습니까? 하지만 나로서는 워낙 감명 깊게 읽은 책이어서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다라〉는 영화 일생에서 가장 적극성을 보였던 작품일 것입니다. 다행이 선암사 측에서 흔쾌히 허락해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임 감독이 그토록 소설에 관심을 가진 것은 두 주인공의 캐릭터 때문이었다고 한다.
"원작을 읽고 가장 감동한 것은 깨달음을 향해 한치의 낭비도 없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두 스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상세계를 향해서 치열하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중교화보다는 깨달음에 카메라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지산스님과 법운스님의 캐릭터에 대해 임 감독은 "계율과 파계·성과 속·산사와 저자거리를 넘나들며 방황한다는 점과 깨달음에 목말라한다는 점에서 둘은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원작과 가장 다른 라스트씬에 대해 감독은 "〈아제아제 바라아제〉가 대승적 수행을 나타낸 것이라면 〈만다라〉는 소승적 수행을 표현한 것"이라며 "자비를 찾아 길을 떠나는 스님들의 모습을 통해 무자비하고 살벌한 당시 정세를 역설적으로 꼬집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유응오 기자 arche@jubul.co.kr
주간불교 848호 2005년 5월
http://www.bulgyonews.co.kr/news/122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