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혜능 선문답 인용 유심 강조
‘호접몽’ 라스트신… 느와르 조신설화
스타일리스트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은 독특한 영화이다. 장르는 느와르인데, 다루고 있는 주제는 불교사상이다. 영화의 서사는 그야말로 단선적이다.
조직폭력배인 주인공이 보스의 여자를 사랑하다가 벼랑까지 몰린다는 게 영화의 줄거리다. 영화의 줄거리는 외피에 지나지 않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선우(이병현)와 희수(신민아)의 관계는 유기적이지 않다. 즉, 선우가 자신의 존재를 걸면서 희수에게 연민을 느끼는 이유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를 통해 관객이 읽을 수 있는 것은 희수를 만나면서 강철처럼 단단한 선우의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선우의 마음이 흔들린 것일까? 이유는 없다. 영화의 시작을 살펴보자.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것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주인공 선우(이병현)의 내레이션은 육조 혜능대사와 제자가 주고받는 선문답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선우의 내레이션이 흐를 때 화면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미세하게 떨리는 나뭇가지는 바로 선우의 마음이다.
이 선문답을 불교용어로 정의하면 ‘일념즉무량겁(一念卽無量劫)’이 되고, 현대물리학적으로 해석하면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절대좌표계와 절대정지계의 부정)이 되고, 프로이트의 사상으로 풀이하면 ‘심인성(心因性)’이 된다.
〈달콤한 인생〉은 유기적인 인과관계로 맺어져 있어야 할 서사가 해체되고 그 빈자리에 우연의 연속만이 자리하고 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젠틀한 조직폭력배 선우는 냉철한 일처리로 보스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다. 그러나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강 사장은 상하이로 출장을 떠나며 선우에게 자신의 정부 희수를 감시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알아서 처리하라는 지시까지 덧붙인다. 그러나 희수가 다른 남자와 있는 현장을 덮쳐 놓고서도 선우는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칼날 같은 강 사장의 성미를 익히 알면서도 선우는 왜 보스의 말을 거역한 것일까. 희수를 사랑한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상하이에서 돌아온 강 사장은 사건의 정황을 눈치채고 선우의 손에 일격을 가한다. 강 사장은 왜 사소한 문제 때문에 수족처럼 아끼던 선우의 손목을 망가뜨린 것일까. 질투심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모든 게 미미한 바람의 떨림으로 야기된 사건이다. 결국 선우는 강 사장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선우는 총을 구입 후 백상조직 보스 백사장을 찾아간다. 백사장이 선우에게 칼을 꽂고 던지는 대화는 매우 인상적이다.
“네가 왜 이렇게 된 이유를 모르겠지. 모든 것을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원래 인생은 고달픈 거야.”
모든 것을 밖에서 찾지 말라는 얘기는 바꿔 말하면 모든 게 마음에 달렸다는 뜻이 된다. 원효스님이 지난 밤 마신 감로수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일각을 깨쳤던 일화가 떠오른다.
보스와의 일전을 앞두고 화장실 유리 앞에서 선우가 읊조리는 독백은 의미심장하다.
“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냥.”
선우의 독백 역시 서사의 인과관계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왜’는 없다. 설령 묻는다해도 그 해답은 ‘그냥’이다.
선우는 보스를 찾아가 총격전을 벌이다 죽음을 맞는다. 임종의 순간에 선우는 희수가 첼로를 켜는 환영을 본다.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달콤한 찰나를 떠올리며 선우는 죽어간다.
영화는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의 형상처럼 처음으로 다시 돌아간다. 사건을 멋지게 해결하고 창 밖을 바라보다가 선우는 복싱 스텝을 밟는다. 그리고, 내레이션이 흐른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장자의 ‘호접몽’과 《삼국유사》의 ‘조신설화’를 떠올리게 한다. 달콤한 꿈 같은 인생. 시종일관 어둠을 좇는 카메라에서 희수의 얼굴만이 유독 분홍빛으로 처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복싱 스텝을 밟으며 주먹을 뻗는 선우의 영상이 비친 창가는 ‘색증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반야심경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라스트신은 실제로 시간이 역행해 원점으로 돌아온 것일 수도 있고, 잠시 선우가 상상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달콤한 초콜릿무스 케이크를 먹기도 하고 쓴 에스프레소 한 잔을 들기도 하는 선우. 삶은 그렇게 생각하기 따라서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다. 인생에 있어 케이크를 먹을 것인가 에스프레소를 들 것인가 하는 선택은 관객들의 몫이다.
유응오 기자 arche@jubul.co.kr
“삶의 부조리 파헤쳐”
청소년기 도선사 즐겨찾아
“삶의 부조리를 부각시키는데 혜능 대사의 선문답이 제격이었습니다.”
김지운 감독은 혜능 대사의 선문답을 차용한 까닭에 대해 이같이 말하고 〈달콤한 인생〉을 찍은 경위를 설명했다.
“우연치 않게 파국의 국면에 몰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삶이 얼마나 덧없고 불완전한 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심리극 〈장화, 홍련〉·코메디 〈반칙왕〉·블랙코메디 〈조용한 가족〉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김 감독. 이번에 느와르 영화를 찍은 이유는 뜻하지 않게 궁지에 몰리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데 그 장르가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비록 형식은 달라도 내용은 다르지 않다”며 “끊임없이 생의 이면에 감춰진 부조리를 파헤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자신의 영화관을 피력했다.
혜화동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도선사에 곧잘 다녔다는 김 감독은 사찰을 찾으면 마음이 엄숙해지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2005년 9월 주간불교 861호
http://www.bulgyonews.co.kr/news/122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