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바람을 뒤로 하고 산길을 걸어 눈 위에 발자국을 남깁니다. 나이가 들면서 자꾸 기력이 떨어져 시간이 나는 대로 잠시 산책에 나섭니다. 나이가 들면 움직이는 것조차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렇다고 따뜻한 방바닥만 의지하는 것이 수행자에게 맞지 않는다 생각하고 앉아 경전을 보거나 하는 일을 멈추고 잠깐이라도 앉아 있기도 합니다. 사르르 떨어지는 눈 소리가 창문 너머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노승의 하루는 별탈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이곳 사천은 눈 소식이 없는 편입니다. 그래서 눈이라도 올라치면 눈 구경 겸 운동 삼아 조금씩 걷습니다. 이 시간이 참 좋게 느껴집니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올라 소나무 사이로 났던 길을 찾아 걷는 것은 재미 중에 재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득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걷는 것은 무척이나 힘이 든다는 생각을 합니다. 눈이 많아 걷기가 불편한 것이 아니라 내 눈앞에 아무도 걷지 않아 그 순수한 여백에 저의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걷지 않은 하얀 눈을 보니 문득 우리나라 최고의 선승 서산대사의 ‘답설야중거’가 떠오릅니다. 그저 눈 푸른 선승의 그림자를 보고 싶은 노승의 바램인지도 모릅니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부수호란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눈 덮인 들길 걸어갈 때
함부로 흐트러지게 걷지 말아라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의 살아온 삶이 어떠했나요?’ 이렇게 묻고 또 묻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습니다. 이 물음과 답 속에 공부가 있습니다. 공부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숨쉬고 느끼고 움직이는 순간 어떤 상태인지 뭘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그 순간이 바로 공부가 익어가는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부라면 여러 단계가 있겠지요. 하지만 가장 쉽게 그리고 깊게 들어갈 수 있는 공부가 언제 어디서나 뭘하는지 나를 올바로 볼 수 있는 그 순간인 것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어떠했나요?’ 이런 물음은 인생의 저녁 노을을 마주한 사람들이 한 번쯤 되돌아 보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이런저런 추억들과 이런저런 삶의 애닮픈 삶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앨범 속에 꼭꼭 쌓여 있을 것입니다. 조금 부담스럽지만, 자신의 삶의 무게에서 한두번이라도 꺼낼 수 있는 부끄런 일이나 재미있었던 일을 회고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야할지를 생각하는 것이 공부라 생각합니다.
눈앞에 닥친 세상살이의 일들도 공부가 되겠지요.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꺼내기 힘들었던 과거의 기억들을 들추어 보는 것도 큰 공부가 될 것입니다.
현대과학은 어떤 면에서는 신의 영역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과 몇 십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구현되니 참으로 놀라운 일 아닌가요? 하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 할지라도 한 가지만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생명 있는 존재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조차도 모른채 영원히 살 것인양 착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누누이 우리들에게 인간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죽기 마련인 삶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또한 인간으로 태어나 참된 가르침을 듣는 것도 어렵고, 깨달은 분들의 출현을 보는 것도 힘들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수많은 가르침의 홍수 속에 부침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좋은 가르침이 많아 내게 맞는 것이 올바른 가르침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저 그렇게 살다가 간다면 이처럼 허망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고 있는 우리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찿아가야 합니다. 그 거룩한 여정에 우리는 한 걸음을 떼어놓았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불자의 길을 걸어나가야 합니다. 그 길이 우리를 미래세에 부처가 되는 멋진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날마다 성성한 날이 간절히 부처님 전에 축원올립니다. 성불하소서.
신해사 회주 무공 스님
http://www.bulgyonews.co.kr/news/38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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