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의 ‘초의’
무애의 춤사위 소매자락 길어서 곤륜산 걸릴라
차(茶) 중에서 우전(雨前)을 상품으로 여긴다. 무엇이고 생명들은 비를 맞으면 어김없이 억세어진다. 여기서 우전(雨前)은 바꿔 말하면 슬픔을 경험하지 않은, 욕망에 눈뜨기 전의 시간일 것이다. 잘 덖은 차의 배냇향을 음미하다보면 미소년의 순정한 눈망울이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잘 덖은 차의 배냇향이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기품 있는 문학작품이 있다. 작가 한승원의 《초의》는 조선 후기 대선사이자 다도를 정립한 초의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역설적이지만 작가가 바라본 초의선사의 행장은 가득 차 있으면서도 텅 비어있다. 부연하자면 염염(炎炎)한 구도기는 수미산처럼 높고, 그 정신은 공(空)하다. 바닥까지 비움으로써 우주를 끌어안는 선(禪)의 진리가 소설 곳곳에 깃들어 있다.
연로한 초의스님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초의스님은 “세상의 모든 여성은 하나다. 사람들은 모두 그 여성의 자궁 속에서 나왔다가 텅 비어있는 우주의 음습한 시공으로 되돌아간다”고 혼잣말을 읊조리며 고향집의 연못을 떠올린다. 쪽색의 하늘이 들어와 있는 연못에는 백수련꽃 여남은 송이가 피어있고 그 꽃의 그림자가 수면에 투영돼 있다. 소년 초의는 “세상은 한 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두 벌이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두 벌은 삶과 죽음·진실과 거짓·현상과 허상 등을 의미한다. 초의스님이 열반을 앞두고 시자에게 묻는다. “보이냐? 저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그림자다.” 이에 시자는 “아닙니다. 그것은 큰스님의 그림자입니다”라고 답한다. 초의스님은 시자를 꾸짖는다.
“이 사람아, 너는 내 허망한 모습(假)만 알아볼 뿐, 석가모니 부처님의 참모습(眞如)을 알아보지는 못하는구나.”
초의스님은 속으로 되뇌인다.
“가랑잎처럼 바스락거리며 살았다. 이제라도 묵묵히 살아야 한다. 텅 비어 있음, 태허가 내 몸에 슴배이도록.”
줄곧 소설을 관류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두 벌의 세상’은 종내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의 깨달음에 닿는다. 초의스님에게는 두 벌의 세상이 다르지 않다. 연못에 비친 것은 태허(太虛)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불교 현상학과 함께 작가는 ‘성속일여(聖俗一如)’라는 불교사회학의 깨달음도 다루고 있다.
역병으로 가족을 잃은 초의선사가 운흥사로 가는 도중 한 아낙에게 도움을 받는다. 아낙은 나룻배를 태워주면서 “먼 훗날 그 돈 받을 사람이 따로 있을 것이오”라고 말한다. 아낙의 빚을 갚기 위해 초의스님은 정진하고 또 정진한다. 아낙의 동전 두 닢을 돌려 받을 이는 이 세상의 모든 대중이었다.
“중은 중다워야 한다. 벙어리 중이 되어서는 안된다. 범패도 해야 하고 탱화도 단청도 할 줄 알아야 하고 바라춤도 출 줄 알아야 하고, 찻잎도 딸 줄 알아야 하고 차를 마실 줄도 알아야 하고, (중략) 관세음보살처럼 천 개의 손, 천 개의 눈을 가져야 한다.”
작가가 초의스님의 다재다능한 면모를 부각시킨 까닭은 참선만을 강조한 나머지 실천이 없는 한국불교의 현실을 꼬집기 위함일 것이다.
중량감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것도 이 소설의 미덕이다.
시·글씨·그림에 능했던 삼절(三絶)이었고, 범패·탱화·단청·바라춤에 다재다능했던 예인이었으며, 실사구시의 실학선승이었던 초의선사의 삶을 다룬 소설답게 작가는 교훈과 함께 재미도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다.
선승의 구도행적을 좇는 소설인데도 작가는 과감하게 로맨스를 삽입했다. 초의스님을 연모해 마침내 출가한 비구니 스님의 캐릭터는 남도 육자배기의 구성진 어조를 떠올릴 정도로 애틋하다못해 저릿하다.
이 소설의 최고 미덕은 작가의 완숙한 사상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글 안에서는 유불선 사상이 구분되지 않고 원융하다.
작가가 최근 집착하는 ‘갇힌 공간 속의 대자유’를 완성한 소설도 바로 《초의》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을 우주공부라고 명명하는 작가. 한승원씨에게는 해산토굴(작가의 거처)이 수행처이고, 장흥 앞 바다가 화엄의 바다인 것이다.
유응오 기자 arche@jubul.co.kr
작가 인터뷰
‘물 흐르듯’ 산 초의
몽중몽실기 전해준 비구니 감사
“초의스님을 알고 난 후부터 세상이 훨씬 아름답고 향기롭게 보였습니다.”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인 초의선사에 대해 “‘호남칠고붕(湖南七高朋)’으로 추앙받던 뛰어난 선승인 동시에 손수 찻잎을 따 만들었던 다도인이었다”고 평가했다.
소설 속에서 추사 김정희가 선정에 든 스님을 보고 화선지에 옮겨 적은 ‘정좌처 차반향초 묘용시 수류화개(고요히 앉아 있는 곳에서는/ 차 반쯤 우려냈을 때의 첫 향기 같고,/ 오묘하게 움직일 때는/ 물 흐르고 꽃 피듯)’라는 글이 바로 제가 본 초의선사의 진면목입니다.”
작가는 이어 초의선사 행장을 복원하는 과정을 회고했다. 초의선사가 태어난 삼향을 비롯해 출가한 나주 남평 운흥사·스님이 가장 오래 주석한 대둔사(현 대흥사) 일지암·《다신전》을 집필한 지리산의 칠불암 등 작가가 찾아다닌 곳은 전국 각처이다. 하지만 작가는 가닥을 잡을 수도 없어 암담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예상치 못한 득을 얻게 된다.
“제가 초의선사의 실체를 찾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한 고찰 암자에서 정진한다는 비구니 스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니는 초의선사와 동시대를 살았던 비구니 니지현순의 〈몽중몽실기(夢中夢實記)〉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헤매는 나의 손에 잡힌 성능 좋은 손전등이자 미로탈출의 지도였습니다.”
작가는 “그 글에 드리워진 초의선사의 그림자가 소설 《초의》의 밑그림이 됐다”고 덧붙였다.
주간불교 863호 2005년 9월
http://www.bulgyonews.co.kr/news/121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