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소설 속 배경이 되는 해인사 대적광전.
사멸에 대한 진지한 탐구
부처가 인도하는
흰소가 끄는 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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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대적광전서
깨달은 常主不滅
1993년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박범신 씨가 절필 선언을 했다. 일간지 연재마저 중도하차한 그의 절필 선언은 일종의 사건이었다. 죽은 듯 침묵하며 지내던 그가 3년만에 대중들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가 들고 온 소설이 바로 〈흰소가 끄는 수레〉연작. ‘잠수함의 토끼’를 자처하며 사회의 아픔을 고발해왔던 그의 펜은 원고지 행간마다 자신을 묘사해 나갔다. 이 연작 소설의 주인공은 20년간의 집필생활을 중단한 작가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절필선언을 수긍하지 못하고 길을 떠난다. 여행을 통해 주인공이 바라보는 것은 자기자신의 내면(本來面目)이다. 작가가 사멸에 대한 진지한 탐구 끝에 본 ‘흰소가 끄는 수레’의 환영이다.
표제작인 〈흰소가 끄는 수레〉를 살펴보자.
눈 내린 해인사로 엘란트라 승용차를 몰고 떠난 화자는 해인사의 고사목 앞에서 마르고 좁은 등을 지닌, 성긴 반백의 머리칼을 한 낯선 사내를 만난다. 사별의 징표라 할 수 있는 고사목 앞에 서 있는데도, 고사목과 무척 닮았음에도 사내는 전혀 쓸쓸해 뵈지 않는다.
화자의 해인사행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작가로서의 임종사(臨終辭)를 써던지고, 느닷없이 떠올린 게 절이었다. 절이란 욕망이 들끓는 세상보다 오히려 더 시간으로의 침식과 사멸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각들의 장소. 폭설로 포위된 고속도로에 들어선 순간 화자는 해인사의 대적광전(大寂光殿)의 고요한 사멸을 떠올렸다.
해인사를 빠져나온 화자는 생전 처음으로 소설을 썼던 무주 적상산(赤裳山)으로 발길을 옮긴다. 무주 적상산은 화자에게 자궁과 같은 곳. 무주로 발길을 돌리다가 다시 사내와 만나고 사내는 화자에게 “신열을 좀 식히라”고 충고한다.
신열이라는 단어에 화자는 자신의 나이가 자신이 자살을 시도했을 무렵의 아버지 나이와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꽃다운 열일곱의 청춘에 보았던 사멸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 사내가 옆에서 말참견을 한다.
“선생의 춘부장께서…… 사멸을 떠올리지 않았겠느냐구요.”
화자는 아버지가 힘없이 쑤욱, 빠진 이빨을 들고 있던 당황한 표정을 떠올린다. 그러자 언젠가부터 정액이 쑤욱, 요도를 빠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상기된다.
신문기사를 읽었노라는 사내의 말에 화자는 ‘연재소설의 중단의 변(辯)’이라는 글을 썼던 것을 떠올린다. 젊은 날 밤마다 휘황한 빛깔로 상상력과 직관의 청천(靑天)을 날던 나비떼의 어휘들이 임종사를 쓰는 순간 갑자기 짚불처럼 날아오르던 것을.
화자는 주머니에 넣어둔 면도날을 만지작거리며 끊임없이 사멸에 대해 생각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막내 누나의 주검들은 오버랩되어 눈앞을 스쳐갔다.
절박한 화자의 심정에는 아랑곳 않은 채 조수석에 앉은 사내는 끊임없이 선문답 같은 불가의 일화들을 들려준다.
“두 제자가 바람이 깃발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한 제자는 바람이 움직인다고 했고, 다른 한 제자는 깃발이 움직인다고 했지요. 혜능대사는 일갈했지. 이놈들아, 움직이는 건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다만 네놈들 마음이 움직일 뿐이다.”
사내의 우주적인 농담을 들으면서 화자는 아득히 먼 곳에서 빛나는 별들을 떠올린다.
별은 청·장년기의 긴 세월 동안 제 내부의 에너지로 불타며 빛나고, 사멸의 예감이 다가오면, 초신성이 된다. 막내누나가 했던 말을 상기하는 순간 사내가 말한다.
“꽃나무도 몸이 부실하면 다른 꽃나무보다 더 서둘러 꽃을 피우고 열매맺지요.”
초신성은 그보다 더욱 건강한 별들, 예컨대 주계열성, 백색왜성, 거성보다 절대광도가 수만배에 이른다. 사멸에의 예감에 맞서, 제 모든 에너지를 한데 그러모아, 길고 긴 별의 수명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얼마 동안 그 어떤 별보다 더 밝고 더 찬란하게 불타올라 마침내 통절한 오르가슴을 경험하는 것이다.
화자는 사멸에의 예감에 더욱 빛을 발하는 초신성을 떠올리면서 스물아홉에 청산가리를 먹고 죽은 누이를 떠올린다. 초신성의 단계를 건너뛰어 고밀도 일제곱센티미터에 일억톤의 중량이 된 중성자별은 술이 취해 꺼이꺼이 울던 누이와 오버랩된다.
면도날을 만지며 죽음의 블랙홀을 떠올리는 화자에게 사내가 다시 불가의 말을 던진다.
“상주불멸(常主不滅)이랬소. 부처께서.”
세간상 이대로 상주불멸이니라. 나무는 부러지고 꺾이고 죽지만 새로 태어나는 나무들 또 있으니 숲은 영원하다고.
화자는 《법화경》의 한 구절을 읊조리면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론을 생각한다. 그러자 화자는 퉁퉁 부어있던 누나의 주검이 떠오른다. 자신의 속내를 꿰뚫는 사내에게 화가가 난 화자는 퉁명스럽게 묻는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사내는 대답한다.
“선생의 어법대로 말하자면 나도……작가요.”
화자는 제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해인사를 찾는다. 해인사 대적광전의 불화를 보는데, 목도리를 야무지게 맨 보살이 말을 건다.
“불 난 집에서 놀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집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장자는 흰소가 끄는 수레가 있으니 얼른 나오라고 말합니다. 이야기 속에서 화택은 바로 이 세상이고, 아이들을 구한 장자는 부처님이고, 흰소가 끄는 수레는 깨달음입니다.”
화자에게 흰소가 끄는 수레를 말했던 사내. 허리띠를 받쳐주는 천 고리 중 오른편의 것이 뜯어진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는 사내. 화자와 똑 같이 방대한 양의 원고를 썼지만 발표한 적이 없다는 사내.
나중 화자는 옷장에서 사내가 입고 있던 것과 똑 같은 바바리코트를 발견한다.
절필을 선언하고 3년만에 다시 돌아온 박범신의 글이 불교의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작가는 소설 속 화자처럼 방황의 여정 끝에 자기자신을 본 게 아닐까? 흰소가 끄는 수레를 열렬히 타고 싶어하는 자신의 모습을.
유응오 기자 arche@jubul.co.kr
작가 인터뷰
무주 안국사 문학 발원지
절필선언 3년만에 쓴 역작
“무주 적상산 안국사(安國寺)는 제 문학의 발원지입니다.”
처음으로 소설을 쓴 무주시절을 떠올리며 작가는 안국사의 정경에 대해 회고했다. 돌이켜보면 제가 즐겨 찾는 절은 한결같이 소담한 곳입니다. 작가는 이어 〈흰소가 끄는 수레〉 연작을 쓰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했다.
“절필을 선언한 게 1993년이었습니다. 절필선언은 작가에게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절박한 실존적 질문을 해결해준 것은 불교였습니다. ‘흰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화택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으니까요.”
고향이 충남 논산이라 소년기에 관촉사에 곧잘 찾았다는 작가. 작가는 향후 소설의 내용이 현실에 기반을 두더라도 도저한 깨달음을 담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현상과 본질을 꿰뚫어야 한다는 게 작가의 문학관이다. 자신의 문학인생에서 〈흰소가 끄는 수레〉는 잊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작가. 작가의 제2의 문학인생이 흰소가 끄는 수레에 오르길 기대해본다.
▩ 작가약력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1981년 대한민국 문학상 수상
소설집 《토끼와 잠수함》등과 장편소설 《풀잎처럼 높다》 《불의 나라》 《물의 나라》 등이 있다.
주간불교 859호 2005년 8월
http://www.bulgyonews.co.kr/news/121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