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선사와 만공선사가 수행했던 덕숭문중의 본산 수덕사.
최인호의 '길 없는 길'
깨우친 소惺牛 찾는 '길 없는 길' 여정
경허 두레박으로 끌어올린 禪 샘물
활구선 취모검에 가슴이 베이고…
최인호의 《길 없는 길》은 경허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액자소설이다.
소설은 화자인 강빈 교수가 고려 공민왕이 직접 만들어 탔던 거문고의 역사를 찾아가며 시작된다. 강빈이 찾아간 곳은 정혜사이다. 공민왕이 노국공주를 그리며 탔던 거문고는 조선말 흥선대원군·민비·의친왕의 손으로 넘어갔다. 거문고가 운현궁에서 선학원으로 거처를 옮겨간 것은 만공스님과 의친왕의 인연 때문이다. 작중 화자는 바로 비극의 왕자 의친왕 이강(李堈) 공(公)의 아들이다.
강빈의 어머니는 비천한 기생출신이다.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듣고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강빈은 생의 덧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가슴에 화인(火印)을 찍어놓은 것 같았던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와도 화해를 한다. 강빈이 어머니의 천도재를 치른 곳은 청계사이다. 청계사는 경허선사가 여덟 살 때 출가해 행자생활을 했던 사찰이다. 강빈은 어머니의 천도재를 지내면서 아버지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던 곳이 청계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강빈은 아버지를 만났던 기억을 더듬으며 사찰을 거닐다가 무심코 ‘무이당(無二堂)’이라고 쓰여진 액자를 본다. 그러자 ‘무이당’이라는 글자가 수덕사 청련당(靑蓮堂)에도 붙어있었던 것이 떠오른다.
‘이것이 둘이 없는 소식이냐, 이것이 둘인 소식이냐. 알아차렸다면 심히 어리석고 완고한 놈이요,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도리어 서로 허락하리라.’
액자에 쓰여진 난해한 법문 내용을 읽어나가다 강빈은 그 문장 가장 뒷부분에 새겨져 있는 사람의 이름을 읽는다. 그 이름은 '경허당 성우(鏡虛堂 惺牛)'.
수덕사 청련당에도 같은 법문이 걸려 있는 이유를 묻자 주지스님은 수덕사에 보장돼 있는 경허선사의 친필을 모본해 걸어놓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주지스님의 설명을 듣고 강빈은 자신의 염주에 새겨져 있는 글자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경허 성우(鏡虛 惺牛)’. 염주는 40여 년 전 아버지가 청계사에서 직접 전해준 것이었다.
강빈은 자신이 경허당과 떼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음을 느끼고 서해 간월암을 찾아 법명스님을 친견하기로 결심한다. 법명스님은 거문고를 보기 위해 찾아간 정혜사의 주지스님이었다. 강빈은 법명스님을 찾아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염주를 건넨다. 법명스님은 염주를 건네는 강빈을 준엄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한다.
“경허는 남이 아닙니다. 그를 찾아 자신을 발견하십시오. 깨우친 소(惺牛)인 경허를 찾아 ‘길없는 길’의 여행을 떠나십시오. 오늘 이 시간이 바로 그 진리의 소를 찾아 첫발을 내딛는 최초의 시간일 것입니다. 죽어도 그와 함께 죽고 살아도 그와 함께 사십시오. 그를 절대로 놓치지 마십시오.”
법명스님을 말을 듣고 강빈은 경허의 발자취를 좇아 ‘길 없는 길’의 여정을 떠난다.
강빈이 경허를 찾아가는 여정이 한 축이라면 소설의 다른 한 축은 경허선사의 행장기를 그리고 있다. 경허선사는 구한말에 꺼져가던 선불교의 불씨를 다시 지핀 걸출한 선사이다. 허선사의 깨달음은 세간의 잣대로는 잴 수 없을 만큼 도저하다. 경허선사의 드넓은 품을 느낄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해보자.
경허선사가 어머니의 간청으로 법회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이날 법회에서 경허선사는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알몸이 돼 어머니에게 다가가 “오줌이 마렵습니다. 어머니, 오줌 좀 뉘어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호방하고 도저했던 경허선사의 행장은 그 자체가 선이라 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을 읽는 선맥(禪脈)의 장구한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다. 특히 불법을 황하의 모래알처럼 퍼뜨린 육조혜능의 활구선과 조주선사의 평상심의 도는 취모검에 가슴이 베일만하다.
유응오 기자 arche@jubul.co.kr
작가의 말
“경허게송 삶의 구경”
성원 보내준 법성스님 ‘감사’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으레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겠습니까’하고 일반적인 답변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주저없이 《길 없는 길》을 꼽고 있습니다.”
소설가 최인호 씨는 《길 없는 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이같이 표현하면서 경허선사에 매료된 까닭에 대해 설명했다.
“경허선사를 알게된 것은 1980년대 말 무렵입니다. 경허선사의 선시 중 ‘일 없음이 오히려 나의 할 일(無事猶成事)’이란 구절에 한 방망이 두들겨 맞고 나는 그무렵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경허선사가 보임생활을 했던 모든 사찰들을 구름처럼, 물처럼 떠돌았습니다.”
최씨가 삶의 구경(究竟)으로 삼고 있는 말은 ‘세속과 청산 그 어디가 옳은가. 봄볕 있는 곳에 꽃 피지 않는 곳이 없구나’ 라는 게송이다.
최씨는 또 “소설 시작이 곧 결제(結制)라고 용기를 주면서 소설이 끝나는 해제(解制) 때까지 경허라는 화두를 절대 놓치지 말라고 말해준 당시 수덕사 주지 법성스님에게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주간불교 854호 2005년 7월
소설 속에 등장하는 거문고.
http://www.bulgyonews.co.kr/news/121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