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봉의 '구나의 먼 바다'
갯비린내 바다서 찾은 깨달음
5.18·10.27법난 질곡역사 관통
별빛처럼 영롱한 문체 압권
《구나의 먼 바다》는 《만다라》와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뒤를 잇는 구도소설이다. 삶의 고해를 산과 바다로 대비시킨 복합구조가 눈길을 끈다. 소설 속에서 산과 바다는 성과 속, 현실과 이상, 삶과 죽음으로 나눠지는 공간이다. 문체가 별빛처럼 영롱한 것도 이 소설의 미덕이다.
먼지 한점 묻지 않은 그 푸른 산빛과 새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새벽 예불을 모시고 나와 대웅전의 돌계단을 내려서면 깜박깜박 돋아오는 그 한의 풍경소리. 아, 누가 그 찬란하게 쏟아지는 눈물의 비원(悲願)들을 알 수 있으랴.
…나 여기 서러운 짐승의 몸은 갖고 있어도
영혼은 항시
밤에만 나오는
저 하늘의 고결한 별이거니.
깨달음의 조갈증 때문에 가슴이 가문 날의 논바닥처럼 타들어 가는 선승의 심경을 잘 그리고 있다. 전법게를 받은 승려출신의 작가가 아니었다면 표현할 수 없었을 살아있는 문장이다.
뱃전에 우두커니 서서 다시 부두의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불빛만은 여전히 깊고 고요한 음악빛깔이었다. 아 영혼을, 영혼을 울게 하는 힘이여. 어디서 구슬픈 노랫소리가 들린다. 그 누구도 감히 범할 수 없는 저 눈물의 모임들. 바닷속 어족들의 비늘처럼 곱고 선량한 저 한의 떨림들. 그러나 날이 새면 다시 또 조용히 죽어갈 저 외로운 심령들…
부두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화자가 읊조리는 독백은 한 편의 시를 연상시킨다. 이 역시 작가가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면 형상화하기 힘들었을 문장이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구나(求那)는 원질(原質)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원질은 반드시 활동하므로 변해 작자(作者)가 되고 다시 달라져서 그 지은 결과 곧 덕이 된다.
즉, 작가는 생의 원질을 산과 바다에서 찾고 있다. 소설 속에서 산과 바다는 깨달음과 자비행으로 나눠지기도 하고 결국 원융삼재의 일원상처럼 하나로 뭉뚱그려지기도 한다.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역사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불교현대사에서 가장 큰 물살이었던 5.18 광주민주화항쟁과 10.27법난을 서사 속에 용해시키고 있다. 소설 속에서 군부독재의 모습은 치를 떨게 만들 정도로 폭력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질곡의 역사를 가로질러 두 수행자가 다다른 곳은 바다다. 그 바다에서 수행자인 두 주인공은 새우잡이 배를 탄다. 하지만 그들이 보는 것은 갈매기 떼뿐이다.
가볍게 물을 차고 나는 놈, 온갖 재주를 부리며 빙글빙글 도는 놈, 소리소리 지르고 달아나는 놈, 파도 위에 올라앉아 미끄럼틀을 타는 놈, 종이연처럼 날개를 쫙 펴고 공중에 높이 있는 놈…
물론 갈매기 떼는 인간군상의 은유이다. 소설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을 때면 열반의 세계는 인과를 초극한 별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소설의 최고 미덕은 가난한 불자들에 대한 작가의 한없이 따스한 시선이다. 소설 속에서 법천스님과 효원스님은 극단의 대비를 이룬다. 제 주머니를 챙기느라 늙은 공양주 보살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천스님과 무불사(無佛寺)라는 부처도 없는 다 쓰러져 가는 절에서 이웃의 가난한 보살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효원스님의 모습은 명암이 극명하게 갈린다. 또한, 가난하지만 삼보에 대한 예만큼은 극진한 보살들의 모습은 기복불교가 지닌 한 지경의 슬픔을 잘 그려내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풍경들은 우리 불교계의 초상화일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 속에서 관세음보살의 화현으로 그려지는 비구니 지선스님의 모습도 독자들의 마음을 애틋하게 한다.
소설말미에서 법인스님은 효원스님의 유언에 따라 안면도 앞바다로 간다. 법인스님은 효원스님이 남긴 마지막 글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읊조린다.
나는 잊지 못한다. 그 한 점 눈물의 먼 고도(孤島)를. 그러나, 그는 결코 청산(靑山)이 없었어도 한탄하지 않았고 단 한 벌의 남루한 작업복으로도 족하게 여기던 삼십 평생이었다. 다만 허씨였다. 만만하기 이를 데 없는 그저 허씨였을 뿐이었다.
가사 장삼을 입은 경외의 대상인 수행자 효원스님이 허름한 작업복의 허씨로 바뀌는 장면은 인상깊다. 그리하여 효원스님의 빈 껍질 같은 육신은 바다에 버려지고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를 이룬다. 바다에는 여전히 갈매기떼만 선회하고…
작가 인터뷰
원담스님 은혜 뼈에 사무쳐
작가의 이름 인봉(印峰)은 그의 승려시절 내려받은 법호이다. 그의 법명은 일성(一星). 수덕사 문중에서는 그의 위로도 아래로도 없는 법명이다. 그가 머리를 깎기로 결심한 것은 스무살. 당시 그는 월명암에 잠시 머물면서 문학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엽스님이 만공스님에 대해 회고한 책을 읽고 출가하기로 결심했다.
“일엽스님의 책을 읽고 나니 시(詩) 따위는 졸장부나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디다. 사내대장부라면 생사가 일여(一如)하다는 깨달음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그는 바로 덕숭문중의 총본산 수덕사를 찾아가 당시 주지 원담스님을 알현하고 머리를 깎았다. 원담스님과의 불연(佛緣)은 그가 환속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가
원담스님을 기리는 마음은 그의 시편 〈스님이 글을 쓰실 때〉에 잘 묻어있다.
“글을 쓰실 때 스님은 山이 된다/ 조용히 웃으시는 山/ 이따금 눈썹 아래로 외로운 세월이 머물고,/ 등에 노을을 지고 한 노인이 간다/ 종을 치면, 다시 부서져 흩어지는 별빛들/ 이윽고 스님은 안개 속에/ 말없이 눈을 감으시는데/ 몇 마리 늦은 철새들만 돌아갈 줄 모른다”
그는 출가 후 혜암선사로부터 화두를 결택받아 견성하고 전법게를 받았다. 그가 산문에 들어 얻은 것은 아상(我相)을 버린 일이다. 빼어난 문재(文才) 때문에 자존심이 유독했던 그이지만 산을 내려올 때는 나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겸허함을 마음속에 간직하게 됐다.
환속 후 그는 시와 소설 창작에 전념했고 1979년 한국문학 백만원 고료 신인상에 〈홍은암 돌샘〉이 당선돼 등단했다. 이어 1989년 문학정신 제1회 천만원 고료 열음소설문학상에 《구나의 먼 바다》가 당선돼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들어갔다.
작가는 현재 인천에 거주하면서 《비구니》 등 불교적 사유가 깊은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유응오 기자 arche@jubul.co.kr
주간불교 850호 2005년 6월
http://www.bulgyonews.co.kr/news/121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