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춘곡'과 '나무남자의 아내'
미당 서정주에게 바치는 헌화가
“이별이게, 내생에 다시 만나기로 하는”
전북 고창 선운사는 미당(未堂) 서정주의 고향이라 글밭의 주요장소로 애용되고 있는 사찰이다. 선운사를 찾았을 때 선운사 입구에는 미당 서정주의 시비 〈선운사 동구〉가 발길을 붙잡았다.
현대사이래 국민들에게 가장 폭넓은 사랑을 받아온 시인. 살아서나 죽어서나 이름 앞에 ‘민족언어의 족장’ 등의 수식어가 애첩처럼 따라다녔던 시인의 시비를 보면서 기자도 미당에 대한 헌화가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디다”라는 대목은 득음한 소리꾼의 완창과 같아서 만해 한용운 스님의 시편에 뒤를 잇는 ‘불교의 초절적 사유가 투영된 작품’이라 할 만 했다.
시비를 지나 선운사 백파율사의 부도 앞에 다다르자 소설가 구효서의 〈나무남자의 아내〉가 떠올랐다.
“백파율사의 부도 앞에서 추사 필적의 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가 세워져 있고, 그 뒤에는 석전스님의 부도가 서 있다. 인신공격에 가까운 논쟁을 나누다 가까워진 추사와 백파, 그리고 그들이 누대 동안 남겨놓았던 아호를 이어받은 석전이 이제는 모두 다만 한 개씩의 작은 돌덩어리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다. 선운사 부도밭엘 나가면 영원의 세월을 가로질러온 향기 같은 게 확 느껴진다.”
작가가 느꼈을 ‘영원의 세월을 가로질러온 향기’를 기자도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당문학에 대한 찬사는 1990년대에 가장 꽃을 피웠다. 당시 윤대녕과 구효서는 몇 년을 사이에 두고 중편 〈나무남자의 아내〉와 〈상춘곡〉을 발표했다.
젊은 날의 애틋한 사랑에 보내는 서간문인 〈상춘곡〉은 선운사 주변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화자는 ‘4월말쯤 벚꽃이 피면 그때 다시 만나자’는 여자의 말에 벚꽃이 피기를 기다리다 문득 편지를 쓴다. 화자는 선배인 화가 인옥의 전시회에서 한 화가가 외는 《법성계》와 《천수경》을 고즈넉한 기분으로 들으면서 10년 전 봄 선운사 석상암에서 문지방에 목을 걸고 자빠져 있을 때 찾아들었던 연둣빛을 떠올린다. 당시 화자는 인옥의 소개로 최란영이라는 여자를 만나고, 협박과 같은 사랑고백을 한다. 화자는 그답 바로 선운사 석상암에 내려가 그녀를 기다린다. 그렇게 보름을 보내고 화자는 아침에 문살 창호지를 투과해 들어오는 연두빛 봄 햇살의 속삭임을 듣는다. 공감각적 표현인 ‘연두빛 봄 햇살의 속삭임’은 다름 아닌 그녀가 오는 소리이자 빛이었던 것.
둘은 열애에 빠지지만 6월항쟁으로 떠들썩한 시국으로 멀어진다. 먼훗날 화자는 란영이 살고있는 괭이밥나무 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어렵게 말한다.
“멀리도 가까이도 말고 그저 계절이 바뀔 때만이라도 한 번씩 봤으면 싶군요”
화자는 그녀와 사랑을 나눈 곳인 선운사를 다시금 찾는다. 선운사에서 그는 벚나무 길에서 애 밴 여인네를 본다.
“어여쁘더군요. 그녀를 보며 왜 내가 또 당신을 떠올렸을까요. 10년 전 내 아이를 가졌을 때의 당신 모습을 말입니다. 그 아기의 애비는 오늘처럼 엄마 옆에 없었지요. 그리하여 아이는 어느 날 돌부처가 되어버리고 도솔암 동백 한 송이거나 잉어 한 마리로 환생해 오늘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인가 봅니다.”
화자는 또 만세루를 서성이다 미당을 만나 선문답 같은 대화를 나눈다.
“동백은 폈던가?”
“아직 안 피었습니다.”
“음, 그래? 하지만 나는 벌써 보고 가네.”
미당 선생의 떠나는 모습을 보며 화자는 생각한다.
‘아 , 나도 벚꽃을 보았으니 오늘내일엔 돌아가야 할까 보다, 라고…….’
사랑하는 여자와 여자의 변심·여자의 불행 등 소설 〈상춘곡〉의 서사는 다소 통속적이다. 하지만 〈상춘곡〉은 이러한 진부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특유의 시적인 문체로 아련한 사랑노래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윤대녕 문학의 미학.
〈상춘곡〉에서 꽃은 “벚꽃도 불탄 검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게 더욱 희고 눈부시리라”고 믿게 되는 화자 마음의 꽃일 것이요, 침향은 천년 뒤 인연이 닫는 후세를 위해 바닷 속에 묻어 만든다는 침향, 바로 “멀리서 얘기하되 가까이서 알아들을 수 있는 지혜”일 것이다.
신산한 여자가 나오고, 미당 서정주가 언급되고, 꽃이 등장하고, 침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것은 소설 〈나무 남자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화자가 침향을 구하러 선운사를 찾으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화자는 자신이 묵는 여인숙 여자와 은은한 향내의 차를 마시게 된다. 차는 염주밭에서 따온 염주로 만든 것.
“처음 저 밭엔 사람이 누워 있는 모양으로 염주가 푸르게 자랐었대요. 어느 이름 없는 탁발스님이 허기와 피로에 지쳐 쓰러져 열반하셨던 거지요. 그 스님의 손에 쥐어져 있던 염주가 시신을 거름으로 해서 싹을 틔운 거랍니다.”
여자와 말을 나누며 화자는 ‘처음으로 갓 쪄낸 옥수수 냄새 같은, 혹은 아주 오래된 여러 가지 꽃잎들이 뿜어내는 향기’를 맡는다.
화자는 침향을 찾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만 좀처럼 구하질 못한다. 그리고, 화자는 생각한다.
“향을 구하려는 의지라는 것도 사실은 향에 기대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보려는 소망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향이라는 건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싣고 저승의 그리운 사람에게까지도 날아갈 수 있는 거라니까.”
그러던 어느날 화자는 여인숙에 한 거구의 사내가 들어오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날 밤, 화자는 아래층에서 격렬하게 성행위를 하는 소리를 듣는다. 화자는 며칠 후 풍천장어와 복분자 술을 먹고 돌아와 낮잠을 흥건히 자고 깨어나 여자에게서 내막을 듣는다. 여자는 풍천장어와 복분자 술을 먹은 남자들을 위로해주던 접대부였다고 과거사를 털어놓는다. 그러던 중 여자는 사내를 만났고, 사내의 아이를 갖기 위해 여자의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이는 들어서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사내가 6.25동란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사내는 어머니가 여맹위원장이었던 탓에 부모를 모두 어린 나이에 잃어버린다. 사내는 동사한 아버지의 품속에서 살아난 기억을 지니고 있었다. 종족보존의 능력이 없는 사내는 행여 북으로 올라간 어머니나 동생이 다시 자신의 집을 찾아오지 않을까 예전에 마당에 있던 고욤나무와 똑같은 나무를 찾아다닌다.
나무남자에게 여자는 자신의 열매를 맺어 줄 나무였다.
하지만 나무남자는 자신이 불능인 것을 알고, 고욤나무를 찾아 헤매는 일에 매진한다. 그 역시 나무다. 여기서 나무는 피폐한 영혼을 무조건적인 연민으로 감싸 안아주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화자는 선운사를 떠나는 날, 향을 구했느냐는 스님의 질문에 말없이 고갤 조아린다. 갓 쪄낸 옥수수 냄새 같은, 혹은 아주 오래된 여러 가지 꽃잎들이 뿜어내는 향기 같은 그녀의 냄새를 떠올리며…….
소설 속에 드러난 사찰 경내를 둘러본 후 기자는 빽빽히 들어선 동백나무 숲 앞에 다다랐다. 푹한 날씨 때문인지 동백의 붉은 꽃망울은 개화를 서두르고 있었다.
찰나와 영원이 다르지 않은 세계, 그것이 바로 불교이며 문학이라는 것을 선운사 동백림은 기자에게 일러줬다.
고창=유응오 기자
주간불교 743호 2003년 2월
http://www.bulgyonews.co.kr/news/121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