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현의 화승 연작
“세상에 꽃밖에 무엇이 또 있겠느냐
드러나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
노사의 혜안(慧眼)에는 모든 게 불이(不二)
죽은 나무에 꽃을 심듯 쓴 문체 ‘압권’
“그리고 또 그렸니라. 일생에 꽃만 그렸니라. 천지에 꽃만 있으라 그렸니라.”
“너도 그리고 싶더냐.”
“……”
“그리고 싶으면 그리거라. 죽어 기둥 된 나무에 꽃을 심는 것도 보시려니……하되 그 꽃이 한번조차 살아 피어나지 않으면 그 슬픔은 그때 가서 어찌 할 텐고?”
“……”
"저렇게 자닝하고도 인자한 꽃을 그릴 수 있겠더냐. 저렇게 너울너울 춤추는 꽃을 그릴 수 있겠더냐. 가마처럼 집도 춤을 추게 할 수 있겠더냐……”
민경현의 화승(畵僧) 연작의 한 편인 〈꽃으로 짓다〉에서 노사와 석이가 주고받는 대사이다. 상여를 보며 노사가 읊조리는 말을 듣고 석이는 바랑의 멜빵을 걸머매며 “속임수다! 노사의 품속에서 시방삼세의 빛깔이 마를 리가 없다. 푸른 강물 속 깊이 금룡의 비늘을 감추어 내어놓지 않으려는 욕심 사나운 속임수다!”고 읊조린다.
비승비속의 인물인 석이는 “불모(佛母)가 빚어내는 화엄세계는 상여의 꽃술 따위와는 댈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경지에 들어선 노사는 상여의 꽃술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꽃으로 짓다〉는 노사와 석이라는 대비되는 인물을 통해 득도한 자의 혜안(慧眼)이 무엇인가 일깨워주고 있다. 노사는 죽은 나무에 단청을 입혀 화엄세계를 빚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른 자이고, 석이는 무르익지 못한 풋내기이다. 석이가 사찰에 묵는 여인을 강제로 범하는 것도 ‘꽃’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 할 수 있다. 꽃이 화엄세계인 동시에 식물의 생식기관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노사가 상여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전통 장례문화에서 영여는 삶을 상징하고 상여는 죽음을 상징한다. 나란히 길을 가는 영여와 상여는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불교의 불이(不二)사상이 담겨있는 것이다. 또, 상여의 꽃술은 온전한 삶의 마감을 상징하는 것이다. 대개의 꽃은 가장 화려한 순간을 맞자마자 지고 만다. 즉, 꽃은 티베트의 만다라가 그러하듯 완미의 극치를 이루자마자 소멸해야 하는 운명을 지녔다.
민경현의 소설은 전반적으로 성속일여(聖俗一如) 사상을 주제로 하고 있다.
〈내영(來迎)〉에서 석이의 사형 중 한사람인 철조사형이 혁필을 이기기 위해 단청을 그리는 것이나, 무녀 하연네가 등장하는 것도 성속일여의 장치라 할 수 있다. 〈내영〉은 아버지에 대한 한을 간직한 철조사형과 무녀 하연네의 영혼이 접맥하면서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과 춤을 완성한다.
성속일여 사상은 〈사제와 나그네〉에 가장 잘 드러난다. 석이에게 예술가는 사제여야 한다는 이른바 예술가 사제론을 설파하는 이소 선생이 등장한다. 이소 선생은 노사의 화우(畵友)인데 친일행각으로 지탄을 받는 인물이다. 석이는 노사를 떠나 보다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선생 곁에 머무른다. 그러나 선생이 석이에게 보여준 절대예술의 세계는 노사가 그린 꽃단청이다.
“생각해보려무나. 꽃을 그리기는 쉽다 해도 도대체 그 꽃을 저렇게 지게 할 솜씨를 무어라 부르겠누. 가히 꽃들을 쉬게 하는 힘까지 갖춘 붓이다. 화려함은 종결의 순간에 극미에 이른다지만 저렇게 꽃들에 더딘 열반을 마련해준 붓도 지고한 뜻이다.”
〈사제와 나그네〉의 줄거리는 출가해 우주만상을 깨달은 후 다시금 사회로 회향한 부처님의 일생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단청뿐만 아니라 범패와 영산재까지 아우르고 있는 〈너의 꿈을 춤추련다〉는 만다라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소설이다. 석이는 비구니의 승무도를 그려 한국화 부문 우수작으로 선정된다. 하지만 노사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실망한 석이는 스승의 곁을 떠나지만 승무도의 모델이었던 희명마저 흩어지는 꽃잎처럼(散花落) 파킨스증후군으로 지고 만다. 희명의 재를 뿌리며 석이는 나무기둥에 금단청을 베풀고 있는 노사의 모습을 떠올린다.
“만다라란 여덟 개의 깨달음과 보리심을 거쳐 더할 곳 없는 곳(無上正等覺)에 다다르려는 마음의 상징이다. 부처께서 법을 설하실 때 세상에 내리는 꽃을 두고 이르는 말이 곧 만다라화니라.”
작가는 예술의 최고 경지는 자아와 우주통합의 상징인 만다라화를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내는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민경현의 문학얼이기도 하다.
노사가 길섶에 핀 들꽃을 석이에게 읊조리는 말은 인상깊다.
“나는 꽃밖에 모르고 살았다. 세상에 꽃밖에 무엇이 또 있겠느냐. 드러나도 부끄러지 않은 것이……”
불의 철학을 통해 독재가 남긴 상처를 형상화한 〈인멸(湮滅)〉은 1980년대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소설이다. 1980년대의 화기를 온몸에 담지한 해련은 상흔으로 노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불의 그림’을 그린다. 노사와 혜련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세상이 뒤집힌 탓이다. 그렇다고 꽃이 필 자리마다 불씨를 놓을 작정이냐?”
“그렇지요, 뒤집힌 세상에 보살심도 뒤집힐 만하니까요.”
“허어! 네 속의 부처가 내 것보다 더 크고 독한 것을……내 망령이 네 망령을 이기지 못할 것을……”
“……”
“가거라, 가되 하나만은 분명히 알고 갈 것이니! 가히 보살도 살생을 하나니, 다만 그속에 살의가 없는 것이 인과가 다른 것이야.”
해련은 결국 본찰에 숨어들어가 그림을 그리다 도둑으로 몰리고, 경찰서에서 공안사범인 것이 발각돼 구속된다. 출소 후 해련은 복지시설 룸비니동산에서 살다가 시설에 불이 나자 아이를 구하다가 불에타 죽는다.
작가가 말하는 불은 인류문명을 상징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이기도 하며, 힌두교 요가수행에서 열정과 정령을 상징하는 차크라의 4단계인 ‘불’이다. 이 소설의 백미는 해련이 광배처럼 불꽃을 품고자 했던 소망을 위해 광배를 그리지 못한 대신 그것을 태우는 것으로 그녀의 넋을 위로하는 석이의 행동이다.
화승연작은 심원한 불교적 사유와 샤머니즘의 주술성이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많은 부분 김동리 문학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주만물의 법칙이 부처님이 깨달은 불법에 귀결되듯 모든 문학도 결국 자연의 모방일 수밖에 없다. 우리 민족의 신화적 상상력이자 집단무의식인 불교를 문학으로 승화한 민경현의 노력은 만다라처럼 환하게 피어 나중 후대작가에게 또 하나의 전범이 될 것이다.
유응오 기자
창작노트 훔쳐보기
한국근현대미술사 소설로 승화 ‘꿈’
작가 민경현 씨와 함께 봉원사 경내를 둘러보면서 빛 바랜 단청이 〈사제와 나그네〉의 노사의 단청을 닮았다는데 공감했다. 작가가 진정으로 다다르고 싶은 곳은 어딜까. 그리고 화승연작을 통해 독자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작가의 창작노트를 훔쳐봤다.
“읽고 싶은 책을 1년만 원 없이 읽어보자는 심사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던 게 1997년 1월이었습니다. 그리고 고시생처럼 책 한보따리 싸 짊어지고 내려간 곳이 경남 산청 율곡사입니다. 주지 일화스님이 사찰에 묵는 것을 흔쾌히 승낙해줘 마음에 꽃씨를 뿌릴 수 있었습니다. 겨우내 마음에 그리고 또 그린 그림이 있었습니다. 바로 단청이었습니다. 그때 쓴 작품이 바로 〈꽃으로 짓다〉였습니다.”
작가는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경위를 설명한 후 자신의 불교관을 피력했다.
“원형을 탐구하고자 원을 세운 저로서는 불교가 당연히 문학의 소재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순 쌍봉사와 산청 율곡사·합천 연호사 등은 제 글의 젖줄이 되었던 사찰입니다.”
작가가 문학의 젖줄이라고 예를 들었던 사찰 중 연호사는 실제로 그의 소설에서 무대로 등장하기도 한다. 연호사에 대해 작가는 “금모래와 대나무 숲이 어우러져 자연의 법신을 십분 느낄 수 있는 고찰”이라고 설명했다. 작가는 또 〈인멸〉에 나오는 복지기구 ‘룸비니동산’에 대해 “부처님이 태어난 곳에서 해련이 죽는다는 것은 일원상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라고 설명했다.
작가는 이어 자신의 문학적 전범인 토마스 만과 김동리에 대해 언급했다.
“제 문학적 전범은 토마스 만입니다. 한국작가 중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작가는 김동리 선생입니다. ”
그는 이어 화승연작의 노사를 비롯해 이소선생 등 작중 인물의 실제모델에 대해 언급했다.
“화승연작에서 노사의 캐릭터는 만봉스님을 모델로 했습니다. 이소선생은 운보 김기창 화백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노사와 이소선생을 통해 한국근현대미술사를 문학으로 승화하는 것이 향후 꿈”이라고 덧붙였다.
주간불교 747호 2003년 3월
http://www.bulgyonews.co.kr/news/121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