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은 끊을 수 없는 ‘끈’
이혼율 높은 세태 경종 울려
함허스님의 ‘각씨서’ 전설 애절
기행소설 〈끈〉의 첫 문장은 ‘넉살좋은 강화년이라더니 옛말 그른 데가 하나두 없다니까!’이다. 이 대사는 양창숙이 지나가는 여자에게 발을 밟히고 내뱉는 말이다. 주변시선을 의식한 주인공 박준호와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 아내 양창숙은 강화도를 놓고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인다.
양창숙이 강화도라는 지역에 감정을 갖는 이유는 춤바람이 나서 친목계를 깨트린 ‘점박이’라는 뒷집여자의 기억 때문이다.
뒷집여자는 소규모로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경영하는 30대의 젊은 사내와 놀아나느라 3천만원 짜리 계를 깨트리고 집마저도 남편 몰래 인감을 도용해 4천만원에 넘겼던 인물이다. 뒷집여자와 친분을 나누며 강화도 문물에 대한 얘길 듣고 와서는 늘상 강화도에 놀러가자고 졸라대던 양창숙은 이를 계기로 ‘넉살 좋은 강화년’을 입에 물고 살게 된다.
박준호는 강화발 화도행 버스에 올라 차장 아가씨에게 “첨성단이 있는 산이 뭐냐”고 묻고 이에 차장은 까끌까끌한 목소리로 “산 이름도 모르고 산엘 올라가신단 말예요?”라고 답한다. 차장의 이런 태도에 양창숙은 “저것두 강화년이라고 쬐그만 게 벌써부터 강화년 티를 질질 흘린다”고 욕한다.
부부는 정수사 가는 능선에서 다시 한 번 말다툼을 하게 된다. 발이 아픈 양창숙은 자꾸 걸음을 멈춰 쉬고 박준호는 “강화년 타령을 하고 싶은 모양이로구만”이라며 빈정거린다. 둘이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린다. 박준호와 아내의 중간쯤 되는 곳의 길옆에서 한 노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억새밭에 누워있던 한 노인이 부부의 얘길 듣고 있다가 일어선 것. 노인의 등장에 부부가 적잖이 놀란 기색을 하자 노인은 “여기가 장소도 널찍하고 풀밭이 푹신해서 꽤 쉴 만하오. 이리들 오시오”라고 말한다.
노인은 곁으로 다가온 박준호에게 “담배가 있냐”고 묻고 박준호는 담배를 꺼내 권한다. 노인은 담배에 불을 붙인 후 “넉살 좋은 강화년의 뜻을 아느냐”고 묻는다.
가슴이 뜨끔한 박준호가 아무 말도 못하자 그의 아내가 대신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가 아니냐”고 잰 입을 놀린다.
노인은 양창숙의 말을 듣고 부드러운 미소로 얘길 이어간다.
“속언에 넉살좋은 강화년이니 또 강화 여자는 발가벗겨 놓아도 삼십 리를 뛴다느니 하는 말이 있지요. 그러나 그건 욕이 아니라 부지런하고 생활력이 강한 이 곳 여인들을 다른 지방사람들이 시기해서 했던 말이라고 하는 얘기도 있어요.”
노인은 또 ‘넉살좋은 강화년’은 ‘넉살좋은 강화 연(鳶)’이 와전된 것이라는 말도 해준다. 강화도 사람들은 재액을 멀리 쫓아버리기 위해 방패연을 날렸다는 게 노인의 얘기다.
노인의 말을 듣고 박준호는 “강화도 출신이냐”고 묻고 이에 노인은 “황해도 연백이 고향”이라고 답한다. 말끝을 맺지 못하는 노인의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그늘 같은 것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박준호는 정수사에 갔다가 아내에게 ‘각씨서’ 전설에 대해 설명한다.
“함허스님이 불도를 닦는데 전심하여 귀국할 줄을 모르자 그를 기다리다 못한 그 아내가 험한 풍랑을 무릅쓰고 원나라에서 먼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거야. 그런데도 함허스님이 아랑곳도 없이 계속 불도를 닦는데만 정신을 쏟고 있자 그 아내가 크게 낙담하여 저 앞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대. 그런데 이상하게도 곧 그 자리에서 가마 모양의 큰 바위가 우뚝 솟더라지 뭐야. 그때부터 사람들은 각씨의 혼이 그런 바위로 변한 것이라고 믿고는 그 바위를 각씨서라고 불렀대.”
부부는 잠시 화해하는 듯 하다가 ‘강화도’를 놓고 잠시 후 다시금 언쟁을 벌인다. 박준호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아내의 뺨을 치고 만다. 바로 그때, 등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노인이었다.
노인은 부부를 불러 화해를 시킨 후 전등사에 얽힌 정화옹주의 얘길 들려준다. 또, 전등사에 들러 나부상의 전설도 들려준다. 전등사를 친견한 노인은 부부에게 “약주를 한 잔 대접하겠다”며 음식점으로 부부를 인도한다.
술청 한가운데 자리잡은 노인은 술이 몇 순배 돌자 자신이 자주 등산을 하는 이유를 털어놓는다.
6.25가 터지던 해 노인의 나이는 서른 다섯 살이었다. 노인은 당시 천석꾼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부잣집 맏아들이었다. 전쟁이 나자 노인은 외가가 있는 강화로 피신을 왔고, 국군이 곧 북진하기만 기다렸다. 부인은 병든 노모를 간병하느라 집에 두고 왔다고, 그것으로 아내와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노인은 휴전이 되던 해 어느날 어머니의 꿈을 꿨다. 드넓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그는 아내와 마주 바라보며 서 있었고, 그 바다 위를 나비 한 마리가 이러저리 날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나비가 아니라 소복 차림의 어머니였다.
노인은 지척에 두고도 고향땅을 가보지 못하는 실향민이었던 것. 노인의 얘길 듣고 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오랜만에 입맞춤을 나눈다.
〈끈〉은 이혼율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작금의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소설이다. 작품의 제목인 ‘끈’은 인연을 상징한다. 불교에서는 옛부터 “옷깃만 스쳐도 몇 겁의 인연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말이다. 옷깃만 스쳐도 몇 겁의 인연이 있는 것이라면 평생을 함께 하기로 백년가약을 맺은 부부의 연은 얼마나 큰 것일까.
〈끈〉은 사랑도 결혼도 인스턴트식으로 하는 젊은세대들에게 귀감이 되는 소설이다. 〈문학사상〉 1985년 1월호에 실린 〈끈〉은 이듬해인 1986년 한국문학작가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작가는 창작경위와 관련 “창작 당시 시대상황이 IMF 때 만큼이나 암울해 이혼하는 가정이 많았다”며 “부부의 연이 얼마나 소중한가 일깨워 주고 싶어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화도=유응오 기자
주간불교 755호 2003년 5월
http://www.bulgyonews.co.kr/news/121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