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l  로그인  l  회원가입  l  아이디/비밀번호찾기  l  2025.4.15 (화)
 http://www.bulgyonews.co.kr/news/34379
발행일시: 2017/05/22 16:48:43  한기선
생각하는 그대로가 인생이다
기획-김태영법사의 아미타염불법문<1>

 

이번호부터 문사수법회 대표법사인 김태영법사의 염불법문을 게재한다. 아미타염불을 수행하는 문사수법회 불자들은 서방극락정토를 염원하는게 아니라 현대의 삶속에서 극락정토를 구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여여 김태영법사의 법문은 일상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한 쉽고도 명확한 법문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법문을 통해 생명의 실상을 깨닫고, 진리로 피어나는 삶의 희열을 느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법문, 如如 김태영 문사수법회 대표법사

 


생명이란 무한히 새롭다는 것을 의미
태어나고 있는 진행형의 당체가 생명
따라서 새롭지 않은 생명은 죽은 상태
그렇기에 산다는 것은 파괴되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입장에서 보면 역설이다


생각의 위대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떤 생각을 선택했느냐와 그에 상응(相應)한 인생이 펼쳐집니다. 때문에 염불(念佛), 다시 말해서 나의 참생명이 무한생명 무한광명의 주인공인 부처님생명을 생각하는 순간 그대로 부처로 삽니다.


이는 곧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가가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그대로가 자신의 인생이듯이, 자신이 생각지 않은 인생은 결코 벌어지지 않음을 시사(示唆)합니다.
가끔가다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이전에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도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과연 그럴까요? 물론 그 사람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게 아닙니다. 생각의 창조력(創造力)과 기억력은 사뭇 다른 차원에서 가려져야 합니다. 당사자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은, 이미 자신의 생각에서 받아들일 준비가 끝났기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보이고 들릴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예측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그것을 인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지은 바대로 받는 것이 인생이요, 인정한 대로 펼쳐지는 것이 인생인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인생의 실상으로부터 인과법(因果法)의 역연함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교리적으로 얘기하자면, 염인(念因)·염연(念緣)·염과(念果)·염보(念報)가 그것입니다. 이른바 인과응보(因果應報)에다가 생각 염자(念字)를 붙여봅시다. 생각의 씨가 생각의 조건을 만납니다. 그랬을 때 생각의 결과가 벌어져서 생각의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생각이 씨를 심은 결과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우연히 벌어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교통사고 원인에 대해서 조사한 통계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는 무척이나 인상적입니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90% 이상이 교통사고가 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운전대를 잡는 순간, 괜히 운전하기 싫었다’는 식의 예상을, 사고가 나기 전부터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니까, 자신의 예상이 맞았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갑자기 여러분은 족집게 예언가가 됩니다. ‘맞아. 나한테 기막힌 예지력이 있나보다.’ 하지만 이는 예지력이 아닌 생각의 힘이 그만큼 무섭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았더니, 정나미가 떨어질 지경입니다. 그래도 못본 척하며 지나치려다가 몸을 부딪치면서 험한 말이 오갑니다. 역시 예상대로 사단이 벌어집니다. 정나미 떨어질 사건이, 생각이라는 스크린에 그린 대로 나타나고 맙니다.


기가 막히지만 그런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스스로 입력(入力)한 정보 그대로 출력됩니다. 콩 심은 데서 팥이 나거나, 팥 심은 데서 콩이 나지 않습니다. 어떤 억지가 개입되어도 불가능합니다. 콩 심은 데서 콩이 나고, 팥 심은 데서 팥이 나는 법입니다.


씨를 심습니다. 그러고 나면 씨가 자라는 게 보일까요? 당연히 씨를 탈피해서 싹이 나오는 게 과정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 눈이 갖는 한계입니다. 헌데 어느 날 보니, 싹이 나와 있는 게 눈에 띕니다.
마찬가지로 불길(不吉)한 생각의 씨를 심으면, 불길한 떡잎이 나오다가 불길한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무서울 정도로 정확합니다.


주변이 얼마나 불길한 것들을 염두(念頭)에 두고 삽니까?
이사날짜 보랴. 결혼 날짜 보랴. 불길한 것을 피하기 위한 조치들로 바쁩니다. 부처님을 뵙겠다고 마음을 내어 법회에 참석하려는 사람이 길일(吉日)의 여부를 따진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겠습니까? 법회 가는 날 그대로가 길일인데 말입니다.

온갖 조건을 먼저 설정하고 그것의 좋고 나쁨을 물으려고 하지만, 오히려 설정한 조건에 조건화되고 맙니다. 곰팡이가 피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토양이 마련되었음을 뜻합니다. 곰팡이 슬은 식빵이 나쁜 게 아닙니다. 식빵에 곰팡이가 필 합당한 조건에 걸맞는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의 조건 즉 염연(念緣)에 따라서 염과(念果)인 생각의 결과가 주어집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는 염보(念報), 즉 생각한 상태 그대로를 살아갑니다. 몸이나 지위나 나이 등의 현상적으로 익숙한 상태는 연속되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과정으로 전개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익숙하다는 미명하에 행여나 다칠 새라 애지중지하며 파괴 당하기를 싫어합니다. 마치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치부하면서, 어떻게라도 버텨보려고 기를 씁니다. 제아무리 용쓰는 재주가 있어도 어쩌지 못하면서, 좀체 그런 시도를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가당착(自家撞着)입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삶을 대하는 명확한 태도를 드러내는 명제(命題)입니다. 여기서 특히 “삿됨을 깨뜨려서 바름을 드러낸다”는 논리적인 순서(順序)에 주목하게 됩니다.


흔히 바르게 사는 길에 대한 논의는 해도, 삿됨을 깨뜨린다는 것의 의미는 별로 중시되지 않는 듯합니다. 바르게 사는 길 또는 방식을 먼저 고려하고 나서, 그런 기준에 맞지 않는 시도나 견해를 삿된 것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착한 사람이 되라”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착하고 바른 사람 되라는 의미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따져본다면, 함부로 할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의 경험이나 관념에 익숙한 자신이 바르게 산다는 것은, 동어반복적(同語反覆的)인 수준을 면치 못합니다. 결국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세상을 재단(裁斷)하겠다는 의도가 감춰져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자신의 기준에서 바르게 하라는 것은, 너는 내 기준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는 강요와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가가 국민을 향해서 바르게 살라는 것은, 자신의 기준에 맞춰서 바르게 살라는 것과 같습니다. 해서 자식을 자신의 아류(亞流)로 키우려고 하거나, 국민을 노예화하는 그런 정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것을 먼저 앞세워 드러내려 해서는 안됩니다. 삿된 것부터 깨뜨려야 합니다. 자기 식으로 바르게 살려고 해서는 곤란합니다. 삿되지 않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삿되지 않기 위해서 살았을 때, 결과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 됩니다.


요약하자면 바르다는 것은 목적어(目的語)가 아니라, 삿됨이 깨뜨려진 결과(結果)에 지나지 않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언제까지나 고정된 인과응보를 되풀이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같은 범주 안에서 같은 현상의 반복이 벌어질 때를 윤회(輪廻)라고 하지 않던가요? 항상하지 않는 상태와 그에 따르는 가치관의 혼돈으로 인해서, 무한히 쫓기며 불안과 초조에 찌드는 구도가 연출됩니다. 그리고 그런 구도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합니다.


생명(生命)이란 무한히 새롭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도 태어나고 있는 진행형(進行形)의 당체가 생명입니다. 때문에 새롭지 않은 생명이란 이미 죽은 상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산다고 하는 것은, 지금 살아 있다고 하는 상태의 입장에서 본다면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는 역설(逆說)이 가능합니다.


생각하는 그대로 인생은 펼쳐집니다.
그렇다면 생명이 무한히 활동할 가능성을 가로막을 새가 없습니다. 지난 생각이 깨지며, 새로운 생각이 돋아나게 합시다. 그래서 언제나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인생에 깃들게 합시다.

 

 

문사수법회 www.munsasu.org 031-966-3581
문사수법회는 경전을 신앙하고 법회를 받들어 봉행합니다.
문사수(聞思修), 즉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스스로를 비추어 보아, 자기 삶을 수정함으로써 정토에 이르는 지혜의 길을 지향합니다.

*대중법회 _매주 일요일 오전 10시30분
*경전학당 _[중앙]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30분, 저녁7시30분
[대전] 매주 목요일 저녁7시30분
*정진원 專修念佛(전수염불) _매월 넷째주 토요일 오후 2시
*팟캐스트 ‘여여법사의 불교와 삶’ (www.podbbang.com /ch/5845)_‘팟빵’앱 설치>카테고리>
종교>‘여여법사의 불교와 삶’ [반야심경,금강경,심우도,육조단경,아미타경 방송중]


기사 출력  기사 메일전송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밴드공유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독자의견 (총 0건)
독자의견쓰기
* 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 등 목적에 맞지않는 글은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등록된 글은 수정할 수 없으며 삭제만 가능합니다.
제    목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스팸방지            스팸글방지를 위해 빨간색 글자만 입력하세요!
    

‘간월암의 일출’

태고종 양주 청련사 불기2568년 봉축 법요식 봉행
 
  l   신문사 소개   l   연혁   l   조직구성   l   본사 및 지사 연락처   l   기사제보   l   개인정보보호정책   l  
copyrightⓒ2001 주간불교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30길 21, 1415호(낙원동, 종로오피스텔)
편집국·업무국 02)734-0777 Fax : 02)734-0779
주간불교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