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과학의 공통점은 인과(因果)의 법칙을 다루는 데 있다. 그러나 차이는 무의식 세계에 비견되는 우주만큼이나 크다. 과학이 현상세계의 원인과 결과를 탐구한다면, 불교의 인연법은 삼세인과(三世因果)를 모두 관통한다. 불교는 현상을 있게 한 업(業)의 총상(總相)을 직관하고, 업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본래면목을 회복하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현상의 문제는 그것을 아무리 밝혀도 일시적 해결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 물질을 아무리 분해해도 본질에 이를 수 없고, 심리학에서 마음을 아무리 정밀하게 분석해도 본심(本心)에 이를 수 없다.
양자물리학과 같은 첨단과학의 이론이 불교의 이해에 도움을 주지만, 과학기술로는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물론 AI를 활용해서 정신물리학, 생명과학, 나노과학 등이 극도로 발전할 수 있다. 더불어 심리학과 물리학이 융합되면, 새로운 차원의 심신의학과 영성과학이 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욕계에서는 물질과 욕망이 물리와 심리를 지배하기 때문에, 인간의 관념적 의식은 물리적 경계 안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은 음양(陰陽), 강유(剛柔), 한서(寒暑), 작용과 반작용, 선악, 애증 등 물질과 감정의 양극적 요소의 연합작용으로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사바세계는 끊임없는 고통으로 정신을 깨우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 세상의 양극적인 구조와 작용 때문에,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무명(無明)의 업식(業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만 욕망의 불길이 사그라진 정도에 따라 깨달음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물리적 차원의 낮은 깨달음은 표현이 가능하다. 물리학에서 모든 법칙을 수학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위없는 깨달음인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은 표현할 수 없는 진리 그 자체다. 비록 과학이 깨달음에 이르는 데 한계를 지니고 있더라도, 물리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학의 도움을 받는 것이 현명하다.
부처님은 인간이 특별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음(五陰)의 일시적 결합이라고 말씀했다. 다섯 단계의 업식을 모두 청정식(淸淨識)으로 전화해야, 위없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오음 전화의 자세한 내용은 《융합창의력과 인간교육》을 참고하고, 여기서는 핵심만 다루겠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무아(無我)가 실존상황이면서 동시에 수행의 방법이기도 하다. 가아(假我)인 업식을 비우고 또 비우면, 마침내 진여의 본심이 드러난다.
오음 중에서 특히 색수(色受)는 욕망에 의해 지배받는다. 《능엄경(愣嚴經)》에서, 부처님은 “생은 식으로 인해 생겨나고, 멸은 색을 따라 사라진다(生因識有, 滅從色除).”라고 말씀했다. 십이연기(十二緣起)와 오음의 전개 과정을 아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다.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그리고 노사(老死)의 열두 인연이 서로 다른 인연화합으로 개인의 오음이 형성된다.
오음의 기초를 이루는 색수(色受)는 육입(六入)부터 노사(老死) 단계에 이르기까지 육신과 심리상태에 가장 원초적인 영향을 미친다. 오음의 상(想)은 생각의 연상작용으로, 십이연기의 명색(名色)과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오음의 행(行)은 생명의 근원 동력으로, 십이연기의 행(行)과 식(識)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다. 그리고 오음의 식(識)은 의식의 본바탕으로, 십이연기의 무명과 대응한다. 물론 십이연기와 오음과의 대응관계를 수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수행의 과정과 단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구체적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에, 관념과 표현으로 이론을 정밀하게 세우는 사람은 깨달음에 이르기 힘들다. 세지변총(世智辯聰)이 팔난처에 속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이 모순 속에 있듯이, 수행도 모순 속에 있다. 모순 속에서 역설적으로 변화하는 이치를 깨달을 때, 수행에 성공할 수 있다. 수행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의 문제다. 세상의 학문은 지식을 계속 쌓아가는 것이라면, 진리의 공부는 계속 비워가는 작업이다. 물론 수행 중에 쌓고 비우는 과정을 반복한다. 무명의 때를 모두 씻어내면, 진리는 스스로 드러난다. 진리를 찾으려 하면 할수록, 찾고자 하는 생각 때문에, 진리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갈망이 없다면, 진리를 추구할 수도 없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수행의 요점이기도 하다.
다시 오음으로 돌아와서, 색수상행식을 단계별로 전화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문자에 한계가 있지만, 문자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색(色)은 몸이다. 우리의 몸은 유전, 환경, 생활습관 등의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깨끗한 상태가 아니다. 또한 사람마다 업연이 다르기 때문에, 육신의 청정도가 각기 차이가 있다. 수행의 기초는 몸을 바르게 하는 일이다. 몸을 바르게 하는 핵심은 자신의 상태에 맞는 몸의 균형조율이다. 방법은 개인적인 불균형의 원인을 역으로 돌려, 자세, 행동, 운동, 식습관 등의 생활습관을 균형조율해서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다. 균형이 회복된 이후에는 균형을 유지하는 데 노력한다. 특별한 수행법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좋지 않다. 개인의 상황에 맞게 몸이 균형을 유지하면, 신경호르몬과 내장 기능이 원활하게 작용하고 심신이 안정된다.
두 번째, 수(受)는 감각과 심리의 단계다. 색수(色受)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몸의 생리가 바로 심리와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 서양의 심신의학(心身醫學)은 바로 이 단계에서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을 주로 다루고 있다. 수(受)는 외부의 자극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깨달음을 지향한다면, 금욕적인 수행법이 필요하다. 이 단계에서 부처님이 권한 수행법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백골관(白骨觀)이다. 욕망의 찌꺼기를 남김없이 제거하는 가장 빠른 길은 욕망 자체가 덧없다는 인식을 뼛속 깊이 체감하는 일이다. 일체의 욕망에서 벗어날 때, 현상의 개관적 실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색수(色受) 단계에서는, AI를 활용한 첨단과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점에서, AI시대는 기초 수행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세 번째, 상(想)은 의식의 연상(聯想) 단계다. 이것은 십이연기에서 명색(名色)으로 구체화 되어 있다. 모든 것이 상대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생각, 즉 관념(名)과 그 대상(色)이 하나로 결합될 수밖에 없다. 대상이 없는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결과를 낸 서양적 사고의 전형이 연상 단계의 의식이다. 다만 불교는 생각도 육경, 즉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한 대상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독특하다.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생각인 법(法)과 물리 상태를 떠난 의식을 구별하고 있는 부분이 불교의 뛰어난 점이다.
양자물리학이 극도로 발전해서 양자컴퓨터가 일반화된다 해도, 그것이 도출해내는 사실은 물리적 변화 속에서 새로운 관점과 개념을 보여줄 뿐이다. 관점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이룬 물리적 융합은 결국 물리세계의 경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상(想)의 단계에서 생각의 사슬을 끊는 좋은 수행법으로는 포행(布行), 화두 참구, 염불 수행 등이 있다. 특히 염불 수행은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법으로, 관세음보살이 사바세계에 가장 적합한 수행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네 번째, 행(行)은 생명의 근원 동력이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생명의 기운과 의식이 하나가 된 상태다. 고대 동양에서는 이것을 기(氣)라고 했다. 기는 일종의 생명에너지정보다. 원초적 생명력과 의식정보가 하나로 결합된 상태다. 행(行)부터는 전문적인 수행의 단계다. 행(行)은 언어적 관념이 끊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이론을 세우는 과학으로는 이 경계를 벗어날 수 없다. 부처님은 이 단계의 수행법으로 안나반나(安那般那) 수행법을 제시했다. 들숨인 안나와 날숨인 반나가 조화를 이루면, 의식과 호흡이 하나가 된다. 이 상태가 안반수의(安般守義)다.
호흡 이외에도 포행, 화두, 염불 등 다양한 집중대상을 통해 의식과 대상이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상태에서 수행이 지속되면, 어느 순간 의식이 새로운 경계로 올라간다. 오음이 전화되는 모든 단계에서 차원이 다른 의식상승이 일어난다. 의식이 비약할 때, 많은 신비한 현상이 발생한다. 이때 생기는 각종 현상을 신통으로 착각하고 집착하면, 마경에 빠지게 된다. 이 점을 특별히 조심하자. 수행은 신통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금강경(金剛經)》의 “마땅히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應無所主而生其心).”는 말씀을 항상 새겨야 할 것이다.
오음의 마지막 다섯 번째 식(識)은 의식의 근원 경계다. 이것은 무명(無明)을 만든 최초의 한 생각이 일어난 미약한 의식의 마지막 습기다. 지관(止觀)이 완전해질 때, 습기의 완전한 제거는 가능하다. 쉽게 말하자면, 몸의 생리와 마음의 심리 작용이 모두 멈춘 이후에, 식(識)을 포함한 오음이 모두 공(空)함을 철저하게 비추어 볼 수 있다. “비추어 본다(照見).”는 말 속에 의식의 습기가 사라지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직관의 힘을 완성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식음(識陰)의 근본은 전도망상이다. 때문에 “일체의 견문과 지각을 멸해, 안으로 그윽이 한가로움을 지켜도, 여전히 법진의 분별영사가 되고 만다(縱滅一切見聞覺知, 內守幽閑, 猶爲法塵分別影事).”는 《능엄경》의 말씀에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식음이 다해도, ‘법진(法塵)’이란 의식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비록 구차제정을 이룬다 해도, 번뇌를 다한 아라한과는 얻을 수 없다(現前雖成九次第定, 不得漏盡成阿羅漢果).”고 분명히 말씀했다. 좌선을 통해 아무리 오래 입정(入定)에 들어도,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선정의 고요함에 안주하면, 공(空)에 집착하기 쉽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단계로 넘어가, 오음을 반대로 중도실상으로 전환해야 한다. 성불하기 위해선 번뇌를 보리로 전화시키는 반야의 대지혜를 성취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행원(行願)으로부터 온다. 대보살들이 대원력을 세워 이 세상에서 보살도를 행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생활수행의 관점에서 <보현보살행원품(普賢菩薩行願品)>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명상이 유행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명상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명상의 목적이 대부분 심리적 안정, 집중력 향상, 심신의 휴식 등과 같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땅에 심는 씨의 종류와 가꾸는 정도에 따라 결실이 다르듯이, 수행의 목적에 따라 깨달음의 종류와 정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완전한 무소유의 정신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행(菩薩行)에 동참해야 한다.
■서동석 박사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 졸업(문학박사)하고 현재 에머슨하우스 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서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재)대상문화재단 이사 겸 동천불교문화재단 상임이사 겸 반야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 광운대학교, 단국대학교 강사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