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불교는 조선시대에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밀려나 주로 산속 깊은 곳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은 도시에서도 제법 큰 절을 볼 수 있지만, 아직도 주요 사찰은 산속에 있다. 기독교가 산업사회 이후 크게 부흥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보다 교회가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위치에 설립되었고, 더불어 대중을 교화(敎化)할 수 있는 교육시스템을 빠르게 갖추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 불교는 지리적 접근성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상대적으로 교육에 큰 투자를 하지 못했다. AI가 등장하면서, 묘하게도 대세의 흐름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산업문명의 광풍(狂風)이 우리사회에 많은 부작용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건강한 삶을 위협하자, 이제는 역으로 생태적 조건이 좋은 사찰이 사회적 관심을 받고 있다.
물질문명이 극에 이르는 특이점 시대 이후에는, AI가 일상의 많은 영역에서 인간을 대체할 강력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노자는 “사람의 재간이 늘어나면 기이한 물건이 갈수록 많이 생긴다(人多伎巧, 奇物滋起).”고 말씀했는데, 아마도 AI시대에는 모든 영역에서 인간이 상상하기 힘든 것들이 급속도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물질적 발전이 극대화될수록, 인간은 본심(本心)에서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본성을 상실한 인간은 AI 또는 그것을 조정하는 배후 세력의 노예가 되기 쉽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물질적 환경에서 잠시 떨어져서 자신을 성찰하고, 본심을 찾기 위한 정신적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한 동안 인생전환을 모색한 적이 있다. 이때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계기는 전국의 절을 다니며 내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의지와 지혜를 얻었던 수행과정이다.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의 사자암, 영월 법흥사, 정선 정암사, 그리고 양산 통도사의 5대 적멸보궁은 물론이고, 단양에 있는 구인사도 가서 참배했다. 그 외에도 많은 사찰을 가보았다. 그 과정에서 1일, 3일, 7일은 물론이고 21일, 100일 정진도 해보았다. 또한 화두참선, 108배 참회기도, 지장기도, 관음기도, 다라니와 진언 염송, 염불, 포행 등 다양한 방법으로 수행을 해보았다.
하지만 뭔가 아쉽고 몸에 딱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 주된 원인은 한국의 불교수행이 출가자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재가자인 나로서는 주인이 아닌 손님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반야연구소 소장으로서 본격적으로 불교수행을 연구하면서, 나는 생활불교수행이 앞으로 미래사회뿐만 아니라 불교의 앞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AI시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종교는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고,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와 양면을 마주하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길은 불교의 핵심인 수행문화를 더욱 깊고 정밀하게 다듬고, 다양하게 구현하는 데 달려있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3대 요소다. 모든 요소에서, 불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수 있는 상황이 되고 있다. 시간적 요소에서, AI가 가속화하는 융합문명사회에서는 물질의 한계를 보완하는 정신문화가 시대적 요구이자 흐름이다. 공간적 요소에서, 우리 사회는 지방의 인구감소로 도농 간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다. 도시의 팍팍한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농촌 지역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생활문화에 수행문화를 접목해서, 도농융합 생활시스템을 개발하고 6차산업형 건강교육문화 융합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인간적 요소에서, 인공지능사회를 대비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를 양성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다. 나는 새로운 인재를 신인류라고 부른다. 신인류는 이전 시대의 사람들과 전혀 다른 가치관과 더불어 새로운 생활문화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인류와 함께 특이점 시대를 맞이할 과도기의 구세대를 위해서도,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생활문화 시스템을 개발할 필요가 절실하다.
나는 이 점에서 3가지 대안을 준비하고 있다. 인간교육원, 수행건강마을, 그리고 건강교육문화 융합플랫폼을 계획 중이다. 인간교육원을 통해 동서융합시대의 균형인재를 양성하고, 수행건강마을을 통해 생활습관을 바르게 개선하고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융합 라이프시스템을 개발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건강교육문화 융합플랫폼을 통해서, 인간교육원과 수행건강마을에서 개발되고 입증된 수행교육문화 콘텐츠를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보급할 예정이다.
3가지 대안을 먼저 절에서 실험해보면 좋겠다. 템플스테이를 통해 수행, 건강, 그리고 교육을 아우르는 융합문화 콘텐츠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보급하면, 불교의 발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출가자뿐만 아니라 일반 신도가 급감하고 있는 현실이다. 아마도 머지않아 관리하기 힘든 사찰이 나올 수 있다. 문제가 터지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상책이다. 부처님도 명마는 회초리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린다고 말씀했다.
절의 시스템을 새롭게 정비하는 과정에서, 출가수행자자와 재가수행자 사이의 역할분담을 새롭게 조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상되는 시행착오를 막기 위해서는, 출가자와 재가자를 연결하는 가교역할이 돼줄 적당한 공간과 더불어 생활불교를 위한 수행과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 범불교 차원에서 사람들이 접근하기 좋은 적당한 사찰을 선택해서, 생활수행의 전문 도량으로 활용하는 용단과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템플스테이의 운영 방식도 완전히 바꿀 필요가 있다. 스님이 주인이 되어 일반대중을 손님으로 맞이하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벽을 허물 수 없다. 재가 수행자들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서로 협력하고 이끌어주는 체계가 마련될 때, 온전한 생활불교수행이 이루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들 중에서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기 위해 출가하는 전문 수행자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이와 같은 선순환 과정을 통해 불교의 인적 네트워크가 더욱 풍부하고 단단해질 것이다. 사부대중이 승가를 이룬다는 점에서, 출가와 재가의 경계는 사실 의미가 없다. 특히 대승불교를 지향하는 한국 불교는 경계를 넘어 소통하고, 미래융합사회에 맞는 불교의 수행과 교육 시스템을 새롭게 융합할 사명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템플스테이의 프로그램 역시 많이 개선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템플스테이는 단순한 휴식이나 채식, 또는 가벼운 명상을 체험하기 위한 정도가 대부분이다. 혹은 특별한 경우에,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기 위해 절에 잠시 머무는 수준이다. 이 정도의 수행으로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 AI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인류에 버금가는 사람으로 완전한 탈바꿈이 필요하다. 이 목적을 위해서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통해 생활습관인 업(業)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밖에 없다. 내가 ‘정업(正業) 프로그램’을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앞선 칼럼 〈융합문명시대 미래종교로서 불교〉에서 지적했듯이, 팔정도(八正道)에 생명과학, 뇌과학, 첨단 심신의학 등을 융합해서 인공지능사회를 대비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한편 업(業)을 바꾸는 일은 단기간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프로그램의 운영도 필요하다. 앞으로 AI가 본격적으로 모든 산업에 도입되면, 주4일나 4.5일 근무체제가 가능해진다. 또한 초고속 교통망의 발달로, 도농통합형 생활이 본격 도입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주말에 정업(正業) 프로그램을 주기적으로 운영하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업(業)을 청정하게 전환하는 시스템을 갖추면 된다. 사찰에서 실증된 생활수행 시스템을 인근 지역에 보급하면, 농촌 공동화와 인구 감소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 수행을 중심으로 건강, 교육, 문화, 그리고 관련 사업을 융합하면, 우리나라가 수행정신문화의 세계 중심이 될 것이다.
현재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대거 은퇴하고 있다. 문제는 AI시대의 전환에 맞게 은퇴자들을 준비시키는 제도적 장치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물질문명을 보완하고 정신문명을 준비하기 위한 교육공간으로, 절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은퇴자뿐만 아니라 전국에 자발적 은둔 청년이 60만에 가깝다는 통계도 있다. 장단기 템플스테이를 통해 이들에게 새로운 생명력과 삶의 지혜를 줄 수 있다. 정업 프로그램을 전국 사찰에 보급하면서, 6개월이나 1년 정도 단기 출가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동시에 사회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일도 중요하다.
불교가 융성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결혼하기 전의 젊은 남성들이 일정 기간 동안 출가하고, 다시 환속하는 전통이 있다. 특히 미얀마에는 이런 전통이 잘 발달되어 있다. 일정 기간 출가를 통해 절제된 생활습관과 바른 식견을 갖출 수 있기 때문에, 출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존중을 받는다. 유대인의 정신문화 교육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유대인 남자들은 결혼 직후 예시바(Yeshivah)라는 전통적인 교육기관에서 1년 동안 머물며, 토라와 탈무드를 학습하고 토론한다. 유대민족 방식의 집중수행을 통해, 새로운 가정을 꾸미는 젊은이들은 그들의 고유한 정신문화를 계승하고, 전체 유대공동체와 하나로 강력하게 결합하게 된다.
우리는 고조선부터 내려오는 수행정신문화의 전통이 있다. 비록 그 전통이 거의 사라졌지만, 생활불교 수행문화를 통해 정신문화를 다시 새롭게 구현할 수 있다. 앞서 〈불교와 수행문화 전통의 회복〉에서 설명했듯이, 산스크리스트어 경전이 한문 경전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서 시작된 선도, 도교, 유교 등의 정신문화가 불교와 융합되면서 수행문화가 더욱 깊고 넓어졌었다. 더욱이 한국 불교는 우리 민족정신을 대표하는 종교로서, 우리의 전통신앙과 하나가 된지 오래다. 우리 민족의 수행문화 전통을 되살리는 길은 융합문명시대의 연기적 상황에 맞게 불교의 수행정신을 확장해서, 모든 종교를 통섭하는 일이다.
모든 종교는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빠르게 교육 시스템을 갖추고 목회자를 대거 양성함으로써 급속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조급한 목회자 양성과 무분별한 교회 설립으로 교화의 수준이 떨어졌다. 결국 교육의 질과 교세 확장의 균형이 무너졌다. 이 점을 반면교사로 삼을 때, 생활불교는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발전할 수 있다.
■서동석 박사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문학박사)했고, 현재 에머슨하우스 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서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재)대상문화재단 이사 겸 동천불교문화재단 상임이사 겸 반야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 광운대학교, 단국대학교 강사 등을 역임했다. AI시대 융합문명사회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인간교육과 수행에 관한 집필과 연구개발을 주로 하고 있다.
http://www.bulgyonews.co.kr/news/38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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