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신을 확립한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삶을 제한하는 환경을 운명이라고 보았다. 운명을 수용하고 대항하는 양면적 태도로, 그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운명에 맞서 대항하는 쪽에 중심이 있다. 그의 정신은 미국의 프로티어 정신과 통한다. 운명에 저항하는 ‘엄청난 반항정신’에 바탕을 둔 그의 자립정신은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큰 정신적 에너지를 제공했고, 미국이 짧은 기간 안에 초강대국이 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비록 균형과 조화를 강조했지만, 에머슨의 운명관은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적인 투쟁과 합일을 전제한다. 동양의 입장에서 볼 때, 운명을 보는 그의 관점은 상대적으로 물질 중심이다. 성인(聖人)들의 말씀 속에는 물질과 정신의 경계를 넘어 운명의 속박을 벗어나는 길이 있다. 특히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나는 운명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부처님이 설파했듯이, 나란 존재는 오음(五陰),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일시적인 존재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나를 이루는 부분은 물질적 측면보다는 정신적 영역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주의 대부분이 알 수 없는 암흑에너지와 암흑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양상과 다르지 않다.
오음이 인연을 맺고 있는 상태가 업(業)이다. 나는 특별한 실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업의 상태 변화로 존재할 뿐이다. 나를 찾고자 하면, 영원히 나를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내 실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음이 작용하는 양상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완전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지 못하다. 의식의 여러 차원인 수상행식(受想行識)이 변화하면, 의식의 파동은 달라진다. 물리학에서 파동이 입자에 우선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듯이, 업의 에너지 파동은 그에 맞는 색(色), 즉 몸을 구성한다. 어제의 세포가 오늘의 세포와 다르듯이, 업의 상태는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 이 점에서, 무아(無我)는 나의 존재 양상이면서, 수행의 핵심이다.
따라서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무아의 나’로서 업을 이해하고, 업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운명은 카르마(Karma), 즉 업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업은 실체가 아니라, 업력(業力)의 파동 흐름이다. 오음의 부조화 정도가 업장(業障)이다. 업장을 해소하는 일이 수행의 기본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이 처한 운명의 굴레에 관해서 의문을 품고, 깊은 고뇌에 빠진 적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운명의 실체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다만 업만이 현행(現行)한다. 그러므로 불성을 가리는 업장을 소멸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업장을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수행이다. 달리 말하면, 운명을 개선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수행이다. 생명의 연기적 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일이 수행이라는 점에서, 수행은 업을 직접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 운명개선에 관한 온갖 방법론이 있지만, 수행보다 근원적인 방법은 없다. 앞으로 인간이 AI와 상대해서 주체적인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통해 정신 능력을 고도로 높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가자를 위한 생활불교수행은 우리의 사찰 시스템 안에는 드물다. 업장소멸의 방편으로 사십구재, 천도재, 지장재 등과 같은 다양한 재사(齋祀) 정도가 있을 뿐이다. 재사는 주로 작고한 분의 영혼을 천도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죽은 사람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업장소멸 시스템이 필요하다. 지금의 재사는 스님이 일방적으로 재문(齋文)을 낭독하며 예식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정작 당사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듣고, 복잡한 예식을 따라하는 수준이다. 재사의 참뜻을 모르고 재사에 참석한다면, 업장소멸이 이루질 수 없다.
절의 재정수입 대부분이 각종 재사에서 나오기 때문에, 한꺼번에 시스템을 전환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재사의 중심을 산 사람으로 전환하면 된다. 예를 들어, 천도재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할 수 있다. 가족은 업을 공유하는 동업중생(同業衆生)이다. 비록 고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고인의 업식(業識)은 살아있는 가족의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남겨진 업을 정화하는 데 천도재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조상은 자신의 심신 속에 업으로 존재하므로, 조상을 진정으로 잘 모시는 방법은 자신의 업을 청정히 관리하는 일이다. 따라서 재사에 참석할 때는 목욕재계(沐浴齋戒)의 태도로 임해야 한다. 심신을 정갈히 하고, 부정한 일을 피하는 정신 자세는 자신의 업을 청정하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업장소멸은 의식의 흐름이 불법의 이치에 따라 매임 없이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의식전환의 경험을 몇 번 해본 적이 있다. 그 중 한 번은 내가 대학의 교수직을 그만 두고 다른 일을 모색할 무렵, 논산 상월면에 있는 백련사에서 지냈던 천도재다. 당시 나는 그 절에서 지장기도와 관음기도를 이른바 사분정근(四分精勤)으로 몇 주에 걸쳐 했었다. 2시간씩 하루에 네 번 나름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렸다. 사실상 수행을 한 셈이다. 주지 스님이 나의 태도에 감동했는지, 천도재를 지내주겠다고 했다. 당시에는 형편도 좋지 않아서, 내가 직접 몇 가지 과일과 필요한 최소의 물품을 사서 재를 올릴 수 있도록 절에서 배려했다. 천도재 이후에 심신이 청량해지는 느낌을 한 동안 받았고, 내 운명의 방향은 점차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또 다른 인생전환의 계기는 천도재가 아닌 본격적인 수행이었다. 반야연구소 소장으로 수행을 연구하던 때인 2011년 여름에, 용인에 있는 백련사에서 21일간 공식적으로 사분정근 수행을 했었다. 이 절의 이름도 백련사인 점이 묘하지만, 이때부터 내 운명은 생활수행으로 크게 전환되었다. 아직도 업장소멸의 길은 멀지만, 그 길은 분명해졌다. 심신을 청정히 유지하는 태도가 일상에서 완전히 체득이 될 때, 업장은 깨끗이 소멸된다.
나는 불교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 부처님이 제시한 팔정도(八正道) 수행법이 생활불교수행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상에서 업을 개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청정하게 유지하는 일이다. 이 점에서,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그리고 정정(正定)을 하나로 연결된 수행체계로 만들고, 시대의 흐름에 맞게 생활 속에서 팔정도가 구현되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팔정도 수행은 정견에서 시작돼서 정견으로 끝난다. 수행의 시작은 정견의 기초를 다지는 단계이고, 수행의 끝은 정견의 완성이다. 정견이 온전히 바로 서면, 팔정도가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우러나온다. 정견이 갖춰지는 과정에서 소위 견성(見性)이라는 일대전환이 일어난다. 견성의 상태에서 팔정도를 완성하는 차례가 견도(見道), 수도(修道), 증도(證道)라고 할 수 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는 수도 이후의 증도 과정에서 일어난다. 수행과정에 관해 여러 가지 논란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다. 말로만 하는 수행은 물질적 차원을 중심으로 한 서양식의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수행일 뿐이다.
업의 실상을 머리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지만, 업의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한 대자유를 체득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생활수행을 일대 사업으로 추진하려는 이유는 나 스스로 깨달음을 조금이나마 직접 체득하고 싶고, 수행문화를 우리사회, 나아가 인류사회와 공유하기 위함이다. 《천수경》의 〈예불문(禮佛文)〉에 나와 있는 “나와 타인이 동시에 불도를 이룬다(自他一時成佛道).”는 말씀은 불교가 꿈꾸는 이상향이자, 실질적인 현상이다. 위없는 깨달음의 순간에 이르면, 우주 만물이 불성(佛性)을 지닌 존재로 마침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태도가 전 세계적으로 젊은 세대의 정신적 트렌드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뉴진 스님의 열풍이 부는 것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연관이 있다. 영적 해방구를 찾는 젊은이들을 불교로 지속적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형식과 내용의 실질적인 조화가 중요하다. 내용이 없는 파격적인 형식은 일시적인 위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처럼, 한국 불교도 지금 커다란 위기에 놓여있다.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는 빠른 판단과 결단이 생명을 살린다. 이 점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시급한 몇 가지 해결책을 제안하겠다.
첫째, 빨리어로 된 초기경전 니까야와 한문으로 번역된 대승경전 중에서, 핵심 내용을 추려서 한글로 쉽게 풀어야 한다. 내가 한문경전을 중시하는 이유는, 앞선 칼럼에서 밝혔듯이, 한문경전 속에 고대 동아시아의 수행문화가 하나로 융합됐기 때문이다. 한편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에서 볼 수 있듯이, 한글은 한자를 가장 잘 표현하는 문자 체계를 지니고 있다. 한글은 인터넷 시대에 가장 효율적인 소리문자라는 사실이 세계 언어학자 사이에서 입증되었다. 한글로 표현된 경전과 수행문화는 앞으로 전 세계의 정신문화를 주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둘째, 복잡한 의식을 단순하고 참여 가능한 의식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를 아우르고 조화시키는 일이 병행되어야 한다. 소승과 대승의 갈등보다는, 소승과 대승의 장점만 추리는 일이 현명하다.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사부대중이 함께 하고, 소승과 대승의 경계를 넘는 포용력과 탄력성을 지닐 때, 한국 불교는 세계 종교를 선도할 수 있다.
셋째, 현재 이 세상에는 독소가 가득하다. 업장소멸의 일차관문은 심신에 쌓인 독소를 제거하는 일이다. 수행은 디톡스(Detox)의 방법들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해결책이다. 이 점에서, 모든 종교를 통섭할 수 있는 보편적 수행문화가 시급하다. 한국 불교가 앞장서서, 참회, 용서, 그리고 자비를 통해 모든 경계를 아우르는 지혜에 이르는 보편적 수행문화를 개발하길 바란다.
세계의 영적 흐름 속에서, 수행문화는 삶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흐름에 대비하지 않는 종교는 앞으로 살아남기 힘들다. 특히 불교는 인류의 업장을 소멸하는 체계를 확립하는 데 시대적 사명이 있다. 영성의 시대에 불성이 빛을 발휘할 수 있는 내용을 시스템화하고 콘텐츠로 만들어서, 수행문화로 보급하는 일이 절실하다. 불법은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생활수행문화 속에 불법을 녹여낸다면, 인류사회의 평화와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생활수행이 최첨단 미래사업의 중심인 이유이기도 하다.
■서동석 박사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문학박사)했고, 현재 에머슨하우스 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서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재)대상문화재단 이사 겸 동천불교문화재단 상임이사 겸 반야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 광운대학교, 단국대학교 강사 등을 역임했다. AI시대 융합문명사회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인간교육과 수행에 관한 집필과 연구개발을 주로 하고 있다.
http://www.bulgyonews.co.kr/news/38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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