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신(神)을 경배하면서도, 한편으로 신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려는 열망을 품고 있다. 성인(聖人)의 삶은 그러한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부처님의 일생은 신의 경계마저 넘어선 대자유인의 경지를 보여준다. 부처님의 말씀은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소승경전과 대승경전으로 나뉘어 세상에 보급되었다. 소승경전은 평범한 일상을 배경으로 진솔한 말씀이 주를 이루고, 대승경전은 신의 영역을 포괄하고 전 우주를 무대로 신통 미묘한 말씀이 주를 이루고 있다. 어느 것이든 위없는 깨달음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소승(小乘)은 자기의 해탈을 위주로 하는 수행을 지칭하는 용어다. 반면에 대승(大乘)은 이타적(利他的) 수행을 통해 인류사회 전체의 성불을 추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불교가 전파된 이래로 소승과 대승의 논쟁과 다툼으로 부처님 말씀의 본뜻을 곡해하는 일은 적지 않았다. 지금 한국불교도 소승과 대승으로 나뉘어 있고, 서로 상대방의 논리를 폄하하는 일도 종종 있다. 특히 빨리어 경전이 우리말로 번역 소개되면서부터, 우리 불교계에서도 대승경전은 비불설(非佛說), 즉 부처님이 설한 경전이 아니라는 비판을 본격적으로 받아왔다.
나는 앞선 여러 칼럼에서, 대승경전, 특히 한문경전을 중시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이유는 앞서 밝혔듯이,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에 이미 존재했던 수행문화가 한문경전 작업을 통해 하나로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번역작업은 국가적 사업이었다. 예를 들어, 인도의 승려인 구마라집(쿠마라지바)을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한 한문경전 작업은 지금의 번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방대한 과제였다. 그 과정에 들인 국력도 어마어마하다. 예를 들어, 구마라집을 인도에서 모셔오는 과정에서 당시 전진(前秦)이 망하고, 후진(后秦)이 새로 들어설 정도로 한문경전 사업에 온 힘을 쏟았다. 그것은 불교경전이 단순히 종교적 믿음을 넘어 인류의 최고 정보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승경전 중심인 한문경전이 부처님의 말씀을 왜곡했다고 보지 않는다. 경전의 도리가 진리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표현은 그 다음 문제일 뿐이다. 구마라집의 일화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그는 경전 번역에서 자신의 잘못이 없다면, 자신이 죽어서 시신을 화장해도 혀는 그대로 남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실제로 화장 후에도 그의 혀는 온전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의 바른 법을 온전히 전하고자 노력한 그의 진실한 마음은 번역작업에 투철하게 반영되었다.
한문은 뜻글자이므로, 글자마다 수행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한자는 중국인들이 만든 글자가 아니다. 이 사실은 이미 그 분야의 전문가들은 잘 알고 있다. 중국의 세계적인 언어학자인 임어당(林語堂)이 우리나라의 초대 문교부장관인 안호상 박사에게 한자가 우리 동이족이 만든 것이라고 한 말은 유명한 일화다. 지금도 중국학계에서는 이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한자의 원류는 고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한문경전 번역과정에서, 고조선의 선도(仙道)를 비롯한 유교와 도교의 용어를 차용해서 부처님의 말씀에 더 깊은 상상력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영향관계와 전통 속에서 발전한 한국불교는 우리의 토속 종교사상을 아우르면서 더욱 풍성하게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우리 사찰에 가보면, 토속 신앙과 결합된 불교문화의 양식을 쉽게 볼 수 있다. 만약 불교의 원형을 찾기 위해 이러한 융합양식을 없애야 한다면, 미래를 버리고 과거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시공(時空)의 경계를 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한, 우리는 현재의 삶을 통해 과거를 안고 미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변화에 맞게 불교의 표현과 양식이 새롭게 변화하는 것은 연기법의 이치에도 부합한다.
그렇다고 소승경전의 내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처님이 하신 초기 설법의 실상을 파악하는 차원에서, 나는 빨리어 경전이 우리말로 제대로 번역되길 희망했다. 최근에 중각 스님(이중표)이 소승경전을 번역하고, 핵심을 추려서 《불경》으로 편찬한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분의 열정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한 개인이 한 번역이기 때문에, 앞으로 그 분야의 다른 전문가들에 의해 수정과 보완이 될 수 있다. 건전한 상호 비평을 통해, 초기불교의 참모습이 보다 생생하게 우리에게 재현되길 바란다. 한문경전 번역에서는 좀 더 많은 전문가들이 협력해서 원문 번역과 요약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소승과 대승의 경전에서 핵심을 더욱 추려서 하나의 통합경전으로 만들 때, 불교의 전체적 균형은 잡힌다.
기독교가 전 세계의 종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계기는 성서공회(Bible Society)의 역할이 컸다. 성경의 번역과 출판, 그리고 공급을 하는 비영리 조직인 성서공회는 지금은 전 세계의 방대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중국전자불전협회(CBETA)에서도 한문경전을 무상으로 보급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도 수행연구 초기에 한문경전을 공부할 때, CBETA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한자는 인터넷 시대에는 맞지 않는 글자체계를 지니고 있다. 중국인도 한자를 이해하기 힘들어서 백화문(白話文)으로 대체하고, 영어를 통해 백화문으로 전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한문경전을 통해 불교를 전 세계에 보급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세종대왕은 한문을 가장 잘 표현하는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AI시대에 우리말이 가장 경쟁력을 지닌 언어체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의 언어학자들과 인공지능 전문가들은 인정하고 있다. 소승과 대승을 통합한 새로운 한글경전을 만든다면, 불교를 세상에 전파하는 데 효과적인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수행적 측면에서도,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오행의 이치로 만든 한글의 소리문자는 인간 내면에 깊은 공명을 일으켜, 본심을 깨우는 강력한 에너지 파동을 낸다. 한국 불교계에도 성서공회와 같은 경전 보급단체가 생기길 간절히 기원한다. 우리말 통합경전과 함께 생활수행문화가 보급되면, 온갖 독소에 찌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밝고 맑게 치유될 것이다.
한편 불교를 전파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그곳의 문화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사람들의 고유한 문화가 다르다. 불교가 우리에게 전파되는 과정에서 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양식과 융합되었기 때문에, 불교는 우리 강토에서 새롭게 융성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에 보급할 때도, 그러한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고 융통성을 지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진리에 입각한 진실한 삶이지, 틀에 박힌 형식과 표현이 아니다. 소승과 대승의 소통과 융합도 이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분란이 없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소승과 대승 모두 깨달음이란 공동 지향점을 추구하고 있다. 비록 지향하는 목적지는 같아도, 개인의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가는 길과 방법은 다를 수 있다. 누가 더 좋고 나쁘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마치 자신에게 맞는 건강법이 제일 좋듯이,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물론 자신의 상태가 변화면, 진로와 수단도 달라질 수 있다. 마치 산의 정상은 하나지만, 올라가는 길과 방법은 수많은 것과 같다. 상황에 맞게 선택하는 것이 인연법이자 연기법이다.
불법은 모든 경계를 넘어 인연자에게 전파된다. 나에게는 소승과 대승의 인연이 다 있었다. 나 자신을 찾아 전전하던 때 만난 인연은 소승의 인연이었고, 불법의 참뜻을 생활불교수행 콘텐츠로 만들어 세상에 보급하려는 생각을 갖게 된 인연은 대승의 인연이다. 나는 구마라집이 한역한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密經)》을 번역하면서 대승불교에 입문했다. 번역 과정에서 주로 참고한 것은 제2의 석가라 불리는 용수보살(나가르주나)이 쓴 《대지도론(大智度論)》이다. 이 책은 불교백과사전이라 불릴 정도로 불교에 관한 방대하고 자세한 해설을 담고 있다.
그런데 《대지도론》을 프랑스 신부 에띠엔 라모뜨(Étienne Lamotte)가 불어로 번역했고, 실제로 카톨릭 수사(修士)들이 불교수행법을 수행에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몹시 놀라웠다. 불교학에 정통한 사람들 중에서 신부가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나님을 진리의 본체로 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인 불교경전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의 인연은 종교의 형식과 경계마저 넘는다. 내가 전공한 에머슨(Ralph Waldo Emerson)도 하나님을 다른 종교의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더 놀라운 것은 청교주의 전통이 많이 남아있던 19세기 미국에서 에머슨의 생각에 동조한 젊은 목회자들이 종교혁명에 가까운 종교개혁을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국의 동부지역 교회에서 성서(Bible) 중에서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도 했고, 심지어 교회가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가 아니라는 사실도 얘기했다. 세상의 다양한 종교를 가진 이민자들이 미국에 모이게 된 가장 근원적인 원동력은 이와 같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유정신이었다. 지금은 그 정신이 많이 퇴색한 느낌이 없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란 용어가 아니라, 진리 자체다. 이 점에서,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서울대 물리학과 소광섭 교수는 《물리학과 대승기신론》에서 부처님을 하나님으로 표현했다. 위없는 진리를 체득한 부처님은 진리로 우주와 하나가 된 분이기 때문에, 그는 에머슨과 같은 생각으로 부처님을 하나님이라고 칭한 것이다. 사실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개신교에서 믿는 하나님에 해당하는 용어는 엘로힘(Elohim)이다. 엘로힘은 개신교식 표현을 그대로 쓰면 ‘하나님들(Gods)’로서 다수의 신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한국에 장로회의 목회를 전파하고 연세대를 설립한 언더우드 박사는 한글성경을 만들 때, 하나님이란 명칭을 두고 고민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나님이란 말은 오히려 우리 민족종교의 내용에 더 어울린다. 민족종교의 경전인 《천부삼경(天符三經)》에서는 신을 두 가지로 나눈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담당하는 영적 존재는 신(神)이라고 표현하고, 진리의 본체는 신(𥛠)이라고 특별히 다른 글자를 썼다. 신(𥛠)이란 한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빛이 충만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말하자면, 진리의 빛으로 충만한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진리 자체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중생을 무명(無明)이라고 하고, 부처님을 광명(光明)이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불교와 민족종교의 우주관이 일치하는 점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부처님이나 하나님이라는 표현보다는 그 의미가 더 중요하다.
흥미롭게도 대승경전을 보면, 삼천대천세계를 한 부처님이 인도하고, 우주에는 이런 부처님이 매우 많다고 한다. 요즘 천문학의 발전으로 우주에는 우리가 속한 은하계와 같은 성단(星團)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부처님의 말씀이 우주시대에 오히려 빛을 발하는 점이다. 무수히 많은 보살들과 신(神)들, 그리고 수많은 부처님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세계는 우주시대에 가장 걸맞은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초종교적인 관점에서 불교가 나아갈 바를 논했는데, 앞으로 전개되는 우주시대에는 형식적 종교의 틀에 갇혀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소승불교로 자신의 중심을 확고히 세우고, 대승불교로 지구촌을 넘어 우주로 나아가야 할 때다. 연기적 변화 흐름에 맞게 타종교의 좋은 점들도 수용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불교의 관행들은 과감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전체 종교의 통섭 차원에서, 나는 생활불교수행과 정신문화의 보급을 병행하고자 한다. 그 길이 불교가 사는 길이다. 앞으로 지도자를 위한 수행교육과 일반인을 위한 수행교육문화 콘텐츠보급 양방면에서, 실질적인 수행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뜻있는 분들이 함께 하기를 소망한다.
■서동석 박사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문학박사)했고, 현재 에머슨하우스 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서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재)대상문화재단 이사 겸 동천불교문화재단 상임이사 겸 반야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 광운대학교, 단국대학교 강사 등을 역임했다. AI시대 융합문명사회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인간교육과 수행에 관한 집필과 연구개발을 주로 하고 있다.
http://www.bulgyonews.co.kr/news/38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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