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는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이 있다. 하나는 신앙적 믿음을 통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존재의 불안을 해소하고, 자신의 소임에 집중할 수 있는 기능이다. 다른 하나는 성인(聖人)이 설한 진리의 말씀에 따라 진실한 삶을 살아가고, 자기 발전을 지속적으로 이루는 일이다. 보통 이 두 가지 기능이 서로 시너지효과를 내면서, 우리를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러나 진리에 이르는 과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성인의 말씀들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 심지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성인의 말씀을 자기중심에서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깨달음의 길은 아득히 멀다. 바른 법에 관해 조금이라도 오해가 생기면, 시작은 미미한 차이라도 장래에는 천문학적인 격차로 진리에서 멀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팔정도(八正道)에서 정견(正見)을 제일 먼저 말씀했다. 물론 〈수행과 업장소멸(業障消滅)〉에서 설명했듯이, 처음부터 완전한 정견이 갖춰지는 것은 아니다. 팔정도 수행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팔정도 전체가 온전하게 삶속에서 구현될 때, 정견은 완성된다.
불교에 입문하는 초기에 정견의 기초를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때 불법에 눈이 밝은 선지식(善知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큰 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말법의 시대에는 선지식을 찾기 힘들다. 선지식이 있다 해도, 그 분의 설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절에 다니는 사람은 드물다. 대개는 소원성취 기도를 하거나, 제사를 위탁하기 위해 절에 간다. 요즘은 템플 스테이가 유행하므로, 잠시 쉬러 가는 경우도 많다. 그 과정에서 절에서 하는 참선을 잠시 맛보는 정도다. 그러나 참선에 대한 바른 이치가 서있지 않으면, 효과는 거의 없다. 겉모습을 볼 때는 뭔가 진리를 탐구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앉아서 멍 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멍 때림으로 심신을 잠시 휴식하는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참선의 진정한 목적인 깨달음과는 거리가 지극히 멀다.
선지식이 주변에 없다 해도, 다행히 지금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불법에 관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문제는 그 정보가 과연 옳은 내용인가 하는 점이다. 근기가 좋은 사람들은 핵심을 파악하고, 스스로 깨달음의 길을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불법을 만나기도 힘들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실천하기는 더욱 힘들다. 불법을 이해하기 힘든 원인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다. 이 부분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불법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된다.
앞서 〈소승과 대승의 경계를 넘어〉에서 지적했듯이, 부처님의 말씀은 소승과 대승으로 나뉘어 오랜 세월 동안 전승되는 과정에서, 관점의 차이로 인한 크고 작은 견해의 차이가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처님 설법의 방식은 대기설법(對機說法)이었다. 부처님은 진리의 법을 중생의 근기에 맞게 달리 말씀했다. 당사자는 자신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듣고 바로 해탈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당사자가 아니다. 시대와 공간의 차이가 있고, 우리의 근기가 다르다. 개인의 인연사를 무시한 수행은 온전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수행을 하나의 사업으로 삼는 경우에, 문제는 더욱 클 수 있다. 각종 교육 단체나 기업에서 임직원 교육에 여러 종류의 명상을 도입하고 있지만, 진정한 효과를 볼 수 없는 것은 명상이 온전한 깨달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심신의 휴식, 감정적인 위로, 생산성 향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 명상은 괴물 같은 존재를 만드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다양한 첨단 장치나 방법을 활용해서 명상의 방식과 형태가 갈수록 세련되어지고 있지만, 실제 내용을 보면 성인(聖人)들의 근본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명상단체나, 심지어 종교단체에도 해당되는 엄중한 문제다. 명상이 악용되는 실례를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한때 세계적인 명상가로 유명했던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의 사례를 들 수 있다. 그는 명상을 사업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 결과, 그를 따르는 명상단체는 각종 부조리와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명상을 통한 신비체험이 일종의 환각제로 작용하면서, 추종자들은 바른 삶의 도리를 망각하고 퇴폐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심지어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다. 결국 이 단체는 불법단체로 법의 심판을 받았고, 오쇼 자신도 불행하게 생을 마감했다. 어떤 명상도 수행의 바른 도리가 없이 종교화, 사업화 되면 벌어지는 현상이다. 본질적인 원인은 폐쇄적인 경계 안의 명상과 기도가 불러오는 패악이다.
수행이 제 기능을 하려면, 대서원(大誓願)을 세우고, 단계를 제대로 밟아가면서, 불굴의 정신으로 깨달음의 목적지를 향해 가야 한다. 무엇보다 초발심의 내용이 중요하다. 마음에 심은 종자(種子)에 따라, 인연의 꽃은 달라지는 법이다. “초발심이 바로 정등각이다(初發心時便正覺).”라는 《법성게(法性偈)》의 말씀은 이러한 이치에 근거한다. 이 점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자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늘 마음속에 되새길 필요가 있다. “중생이 끝없이 많지만 모두 제도하겠습니다(衆生無邊誓願度). 번뇌가 다함이 없지만 모두 끊겠습니다(煩惱無盡誓願斷). 법문이 한량없지만 모두 배우겠습니다(法門無量誓願學). 위없는 불도를 모두 이루겠습니다(佛道無上誓願成).”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정신적으로 큰 방황을 했다. 그때 여러 종교를 다녀봤지만,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인천에 있는 한 선원(禪院)에서 참선을 하면서, 내 마음은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그 기운을 받아 나는 당시 내가 기거하던 다락방을 화장선원(華藏禪院)으로 삼고, 나름의 수행을 한동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사홍서원과는 조금 다르지만, 나는 모든 불보살과 함께 중생구제에 나서겠다는 야무진 서원을 했다. 아마도 그 당시 심은 수행의 인연종자로 인해, 내 인생은 여러 과정을 거쳐 본격적인 생활수행의 길로 접어든 것 같다.
우리가 명상을 하는 진정한 목적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다. 불교의 참된 가치는 선정이 아닌, 지혜에 있다. 이에 관한 의미심장한 일화가 《법화경(法華經)》 〈화성유품(化城喩品)〉에 나온다. “대통지승불은 십겁을 도량에 앉아 있었지만, 불법이 드러나지 않아 불도를 이룰 수 없었다(大通智勝佛, 十劫坐道場, 佛法不現前, 不得成佛道).” 과거불인 대통지승불은 좌선(坐禪)을 통해 신묘한 지경에 들어가, 수명의 제한을 받지 않고 십겁이라는 장구한 시간동안 선정(禪定)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앉아서 마음을 집중해도, 불도의 도리를 깨칠 수 없었다. 선정만으로는 지혜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지승불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선정의 목적은 신통이 아닌 완전한 지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중요하다. 팔만대겁을 선정에 든다 해도, 생명의 지혜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선정을 바른 길로 안내하는 이정표는 경전의 말씀이다. 선교쌍수(禪敎雙修)는 깨달음으로 가는 좌우의 날갯짓과 같다. 시절인연에 따라 어느 하나에 집중할 수는 있지만, 수행이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 선교(禪敎)의 선후(先後)를 따지거나, 중요도의 비중을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다만 인연의 선후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선(禪)을 통한 정(定)과 교(敎)를 통한 혜(慧)가 하나가 될 때, 수행은 완성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성현(聖賢)의 말씀을 항상 수행의 동반자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경률론(經律論)을 읽을 때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중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소승경전과 대승경전 전체를 아우르는 관점을 먼저 갖춘 다음에, 세세한 부분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향이 옳은 길이다. 생활수행의 중심을 세우는 데도 중도의 이치는 핵심원리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전후, 좌우, 상하 등의 맥락을 융회관통(融會貫通)하는 노력을 항상 기울여야 한다. 그 과정에서 중도의 원리와 방법을 체득할 수 있다.
앞으로 사찰은 출가자 위주의 수행처에서 탈피하고,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구조가 될 때, 인류사회의 앞날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다. AI로 인해 미래사회는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경계가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AI가 촉발하고 있는 융합문명시대에는 세간과 출세간을 융합하는 출출세간(出出世間)의 시대가 열릴 수 있다. 출가수행자와 재가수행자가 함께 새로운 시대를 대비해야 하는 이유다. 2045년으로 예상되는 특이점 시대가 멀지 않았다. 지금 AI시대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사찰의 기능이 크게 축소될 수밖에 있다. 이것은 모든 종교에 해당된다.
단순히 믿음을 중시하던 시대는 끝이 나고 있다. 믿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이미 세상은 불국토가 되었을 것이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말하면, 신앙의 힘으로 인류사회는 이미 천국으로 변했어야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전쟁, 기아, 재난 등으로 고통스럽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좁은 영역에서 구원을 바라고 있는데, 하늘이 누구를 구할 수 있겠는가?
현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해답은 변화의 이치에 맞게 사는 것이다. 그 이치를 통찰하는 마음의 눈이 바로 지혜다. 모든 성인들은 상황에 맞게 지혜의 말씀을 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때, 대자유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했다. 다만 아쉽게도 진리의 근원에 이르는 방법은 현재 불교 이외에는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다. 부처님의 말씀만이 모든 현상을 넘어 본원에 이르는 근원적 지혜를 상세하게 담고 있다. 이 점은 불교가 미래의 종교가 될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이다. 스스로 자신을 구하는 종교는 어떤 사회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불교가 기복으로 치우치면, 불교도 진정한 종교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우리는 수행을 즐기던 단군의 후예다. 단군이 천명한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의 전통사상과 불교가 지향하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은 표현만 다를 뿐 지향점이 같다.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하는 근원은 진리이고, 진리에 이르는 시발점이 되는 수행의 종자는 자비의 마음이다. 자비의 마음에서 싹튼 종자가 모든 존재를 하나의 생명공동체로 만드는 원동력이다. 따라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중생을 구하겠다는 자비심에서 근원적인 지혜가 나오게 된다. 큰 지혜는 큰 자비에서 나오는 법이다.
■서동석 박사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문학박사)했고, 현재 에머슨하우스 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서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재)대상문화재단 이사 겸 동천불교문화재단 상임이사 겸 반야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 광운대학교, 단국대학교 강사 등을 역임했다. AI시대 융합문명사회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인간교육과 수행에 관한 집필과 연구개발을 주로 하고 있다.